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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06.06.13
제목
[시베리아 여행기 12부] 나의 계획된 배반 / 이정환  (6)
첨부파일
 

 

시베리아횡단열차는 태양을 향해 달린다

(12부)

 

 GSnJ 이사장 이 정 환 

 

20. 나의 계획된 배반

 

  출입문이 닫히고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홈에 서서 손을 흔들던 민정이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리가 아쉬운 마음에 어깨를 떨구고 객차 안으로 들어서자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듯 이르쿠츠크까지 동행했던 예의 일본인 노부부와 가이드 아가씨가 반갑게 인사한다. 그들도 바이칼에서 이틀간 머물고 이제 모스크바로 가는 길이란다. 조금 심술 있어 보이는 할머니가 바이칼이 정말 좋았다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동안 아주 순해 보이는 할아버지는 웃으며 고개만 끄덕인다. 가이드 아가씨 유리나도 바이칼을 처음 보았다며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귀엽다는 듯 바라본다. 일을 하며 저렇게 즐거울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번 기차는 시설이나 서비스가 이전 기차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 사이만을 왕복하는 말하자면 관광열차였다. 객실 식탁에는 생화가 꽂혀있고 커피 잔도 두개 가지런히 놓여 우리를 맞았다. 커튼도 훨씬 맵시 있고 창문도 깨끗이 닦여 있어 정말 일등칸답다. 그동안 나는 왜 기차의 창문을 깨끗이 닦지 않을까 늘 불만이고 의아했다.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큰 낙인 우리에게 맑은 창문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간절했으나 이제까지의 두 열차는 그런 우리를 실망시키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맑은 창문에 감동하고 고마워했다. 맵시 있게 나비 모양으로 묶여 있는 커튼을 풀어 활짝 열어젖히자 푸른 하늘과 오후의 햇빛을 그득히 받아 반짝이는 자작나무 숲이 맑게 닦인 창문을 가득 채워 세잔느의 그림같이 펼쳐진다. 나는 이번에도 복도에 붙어있는 열차 운행시간표를 살펴 주요 정차역과 정차시간을 기록한 후 지도 위에 하나하나 표시했다. 4시간 반 후에 ‘지마’에서 15분 정차하고 다시 네 시간 후 ‘니쥐니우진스크’, 또 5시간 달려 ‘일란스카야’에서 각각 20분씩 정차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아마 지마 도착은 해질 무렵이지만 니쥐니우진스크와 일란스카야에는 한 밤중 우리가 자는 사이 도착할 것이므로 내일 오전 ‘그라스노야리스크’에 가서야 홈에 다시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두어 시간 지났을까 간단히 요기도 하고 맥주도 한잔 할 겸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는 지난 번 보다 더 키가 커 보이는 아가씨가 흰 블라우스에 감색 스커트를 단정히 입고 우리를 맞았다. 그런데 식당 한 구석에 보안군으로 보이는 군복 입은 사나이가 둘이서 권총을 찬 채 다리를 길게 뻗고 의자에 기대 앉아 TV 모니터에 비치는 영화를 보고 있었다. 공연히 두려운 느낌이 들었으나 애써 태연히 먼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키 큰 아가씨가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었다. 내가 ‘잉그리쉐?’ 라고 하자 그녀는 뜻밖에 ‘예스’하며 아주 낡은 영어로 된 메뉴판을 가져왔다. 역시 이 기차는 다른 기차와는 격(!)이 틀린다. 영어로 된 메뉴판이 있다는 여행안내서의 이야기는 이 기차를 두고 하는 말이었나 보다. 하여튼 책과 현실은 일치하지 않는 일이 다반사지만 또 잘 맞는 경우도 많은 것은 어디서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야채샐러드와 수프를 식혔는데 수프는 어제 우크라이나 식당에서 먹었던 붉은색 수프였다. 고기국물에 감자, 양파, 홍당무를 넣어 끓인 것인데 러시아에서 제일 잘 먹는 수프의 하나인 ‘보르쉬’ 라고 박 교수가 이야기 했던 것이다. 수프와 같이 맥주를 마시며 저녁 햇볕 가득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제까지의 시베리아와는 달리 초지와 밭이 넓게 펼쳐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차를 바꿔 탈 때마다, 그리고 하루 밤을 자고 날 때마다 창밖의 풍경이 새로워지는 것이 더없이 즐겁다.

 

  우리를 감동시킨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날 저녁때였다. 방으로 돌아와 책을 읽다가 아내와 같이 잠시 깜박 잠이 들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항상 불안감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노크소리에도 깜짝 놀랐던 것이다. 문을 열자 여자 승무원이 얼굴 가득이 미소를 짓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항상 무뚝뚝한 승무원의 눈치를 보아야 했으므로 이렇게 밝은 미소를 짓고 나를 찾아온 승무원이 도리어 이상했다. 그녀는 침대를 가리키며 무어라 한마디 하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잠이 깬 아내도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사이 그 승무원은 능숙한 솜씨로 침대에 시트를 펴고 이불을 깔았다. 아, 이 과분한 서비스! 우리는 그저 감동할 따름이었다. 시트를 개어 내놓으라고 위압적인 표정으로 손짓하던 하바로프스크행 열차의 승무원에 기가 질렸던 우리였으니 이 뜻밖의 서비스에 감동할 수밖에. 아마도 대부분 승무원들은 아직 사회주의 시대 공무원 문화에 젖어 있어 승객에게 서비스한다기보다 관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했지만 어찌 불만이 없었으랴. 아무튼 우리는 ‘스빠씨버(감사합니다)’라고 합창으로 외치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마침 그 때 이동 매점 아가씨가 지나가기에 또 맥주 두 캔을 사고 서울서 준비해 간 ‘가평 잣’을 꺼냈다. 잣 몇 알을 입안 넣자 진한 솔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뜻밖의 승무원 서비스가 남긴 기분과 어울려 마음이 언제보다 가볍고 맥주 맛, 안주 맛도 언제보다 좋았다. 창밖엔 예의 불타는 저녁노을이 지기 시작하고 아내는 이르쿠츠크의 학생이 MP3에 저장해준 음악을 들으며 한껏 즐거워한다. 그 학생이 저장해준 음악은 섬머타임 같은 재즈곡과 유키구라모토의 피아노곡, 쇼팽의 왈츠곡 등 알기 쉽고 듣기 좋은 곡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행복한 느낌의 정점에서 나는 불현듯 30여 년 전으로 날아가며 콧날이 시큰해졌다.
 
  일본에서 석사과정을 막 끝내고 박사과정에 진학하려던 3월 어느 날, 학교 연구실에서 밤늦게 집에 돌아오자 아내가 아버님이 보낸 편지를 내밀었다. 조금 흘려 쓴 편지에는 “…내가 이제 눈도 어둡고 농사일이 너무 힘들구나. 네가 돌아와서 농장을 맡아 주어야겠다.…”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약한 말씀을 한 적이 없는 아버지가 박사과정에 합격했다는 나의 편지를 보고 호소하듯 쓴 편지였다.

 

  아버지는 지금은 옛 모습을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시흥군 서면이라 불리던 곳에서 채소농사를 지으셨다. 일본 농업서적을 구해 밤마다 탐독하시고, 아마 서울 근교에서는 제일 먼저 비닐농사를 시작할 만큼 모험적 농부셨다. 아버지는 약주를 아주 좋아 하셨는데 한잔 하시고 기분이 좋으실 때는 신명나서 당신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또 그 이야기예요. 아이들이 듣기 싫대요.’라는 어머니의 핀잔도 아랑곳없이. 이곳으로 오시기 전 평양에서 해산물을 전문으로 하는 도매상(내 기억에 ‘동부상회’라고 하셨다)을 운영하시며 펼치던 ‘개성상인(아버지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셨다)’의 영웅담은 내가 술술 외울 정도였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할아버지에 대한 자랑과 연민을 빼놓지 않고 이야기 하시며 목소리가 떨리곤 하셨다.

 

  “할아버지는 개성에서 평양으로 오셔서 중국과 무역을 하시던 객주셨지. 그런데 어느 해 큰 손실을 보시고 그 충격에 내가 어릴 적에 일찍 세상을 떠나셨단다. 아마 나도 할아버지의 개성상인 피를 이어받아 장사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 하시며 당신 성공의 공을 할아버지에게 돌리셨다. 그러나 일제 말년 통제경제체제가 강화되면서 모든 상거래가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식량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잠시 농사를 짓는 것이 제일 낫겠다 싶어 지인의 소개로 시흥에 농토를 마련하여 오셨단다. 그러나 끝내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하시고 시흥에서 숨을 거두셨으니 인생은 때때로 전혀 생각지도 않던 길로 가는 것인가 보다. 나도 그랬듯이.


  “그런데 보통농사보다는 아무래도 좀 다른 농사를 해야겠다 싶어 감자, 참외, 상추, 배추 같은 채소농사를 시작했거든. 그런데 그것을 마차에 싣고 서울에 가면 불티나게 팔렸지. 그래서 처음 3,000여 평으로 시작한 농사가 이렇게 점점 늘어나니 정말 그 재미는 비할 데가 없었다. 평양서 장사하던 즐거움하고는 또 달라.” 그리고는 꼭 덧붙이셨다.


  “농사는 가장 좋은 직업이야. 너두 농사를 지어라. 내가 비닐하우스 3,000평만 만들어 물려 줄테니”라고

 

나는 아버지의 이런 말씀을 초등학교 시절부터 수없이 들으며 큰 농장을 경영하는 농부가 자연스런 꿈이 되었고, 그래서 농과대학을 가는 것은 나에게 아주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큰 회사하는 집 아들만 해외 유학 가니. 농사꾼도 이제 해외유학도 해야 한다. 너도 일본 가서 한 일이년 공부하고 오너라.”


  그래서 1973년 1월 나는 단돈 200달러를 가지고 일본으로 갔다. 눈이 가슴까지 쌓인 삿뽀로에 도착하던 날의 설레던 기대와 흥분은 지금도 생생하다. 처음 계획은 대학에 연구생으로 적을 두고 경영학 강의를 들으며 일본의 선진 농가를 여기저기 방문하여 농업경영인이 될 준비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나는 그 길에서 멀어져 갔고, 그렇게 된 것은 '아베‘라는 나쁜(!) 친구의 꼬임 때문이었다.

 

  ‘아베’는 도수가 아주 높아 보이는 뿔테 안경을 쓰고 머리는 뽀글뽀글 파마를 했는데 나에게 유난히 친절했다. 한국에 대해 아주 별 것 아닌 것을 묻고 내가 대답을 하면 ‘아아, 소오데스까!’라고 자못 감탄하는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런 그의 권유로 일본 학생들의 스터디 미팅에 나가 농업경제학 서적을 같이 읽는 사이, 나의 별 것 아닌 발언에 ‘리상, 혼또 수고이데스네. 소꼬마데 강가에른데스까(정말 대단하네요. 거기까지 생각했습니까)’ 라며 감탄하는 속임수(?)에 현혹되어 나는 한발 한발 그 길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석사과정 입학과 졸업, 박사과정 합격으로 이어져 아버지와의 약속은 허무하게 깨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의 배반은 ‘예정된 배반’이었고 아베는 나의 ‘예정된 배반’을 도와 준 도구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슴이 아프고 목이 메었다. 서둘러 짐을 챙겨 3년 만에 집으로 돌아 왔다. 집 안마당에 들어서자 아버님은 ‘이제 왔구나.’ 하는 한마디만을 하시고는 얼른 뒤로 돌아서셨다. 내가 대학생 시절 혼자 한 달간 전국을 여행하고 안마당에 들어섰을 때와 똑같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공부하려는 아이를 불러 들였다고 야단이셨고 집안 식구들도 아버지에게 ‘농사일을 이어 받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 박사 공부를 하게 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어느 날 밤 아버님은 ‘그래 일본으로 돌아가 공부를 끝 내거라. 농장은 내가 몇 년 더 돌보마’ 라고 쓸쓸히 말씀하시며 자리에 누우셨다. 나는 그때의 아버지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곧 심한 기침 끝에 폐암진단을 받았고 두 달여 병원에 게시다가 내가 귀국한지 겨우 다섯 달 만에 ‘무슨 병이냐’고 한번 묻지 않고, 또 괴롭다는 호소 한번 없이 숨을 거두셨다. 나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당신은 자신이 죽음의 병에 걸리신 것을 아셨을까? 왜 무슨 병이냐고 한마디도 묻지 않으셨을까? 어떻게 아픔을 호소하지 않으셨을까? 나는 아버지의 농장을 졸지에 이어받았으나 다음해 농사를 겨우 끝내고 어머니에게 떠밀려(라고 말하며) 다시 일본으로 향했고, 아버지가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농장으로 키워주기를 기대했던 그 땅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이제 눈도 어둡고 농사일이 너무 힘들구나.’ 라시던 아버지의 마지막 편지와 ‘이제 왔구나.’ 하시며 돌아서시던 모습, 그리고 ‘그래 일본으로 돌아가 공부를 끝내거라.’ 하시던 표정을 생각하며 눈물이 흐른다.


  아내가 훌쩍이는 나를 흘깃 쳐다보며 ‘왜 그래요. 또 당신 아버님 생각하는 거야.’ 라고 가볍게 한 마디 던지고 예의 골프공 한 개와 세면도구를 챙겨 나간다. 부부의 감정은 때로 미묘하게 어긋난다. 어긋날 뿐만 아니라 망가트린다. 아내의 가벼운 핀잔(글쎄, 핀잔이랄까?)이 나의 감정을 망쳐버렸다. 나는 승무원이 친절하게 펴준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가슴을 통해 기차의 규칙적 율동이 온몸으로 퍼져가는 것을 즐기며 아내가 돌아오기 전에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으로 ‘그녀에 대한 빚’을 갚아주었다.

kinghan7  [date : 2006-06-21]
지난날의 이야기를 하셨는데 지난날에 관한 특정의 사진이 한 장이라도 실려 있으면 더욱 좋을 듯합니다만.
leejh  [date : 2006-06-16]
저의 아버님을 기억하는 분이 게시다니 정말 반갑고, 저의 감정에 공감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매우 행복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joran1958  [date : 2006-06-16]
그렇게 가슴아픈 추억을 되새기며 눈물짓다가도 금방코를 골며 자는 것이 남자들이란 것을
우리 여자들은 다 알거든요.....^^그걸 미리 아신거예요. 사모님께서.....

기회되면 아버님 이야기를 한 번 쭉 써보시지 그래요.....
큰 사람...큰 생각...이 결국 원장님같은 분을 슬하에 두시는 큰 일을 해내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jmhwang  [date : 2006-06-15]
제가 서울농대 다닐 때 원장님 농장에서 일하시던 아버님의 소박하시면서 건강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특히 시베리아 여행기를 너무 감동적으로 읽고 있어 계속해서 기다리게 됩니다. 좋은 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aghope  [date : 2006-06-15]
감동은 역시 마음 속 깊이 사무친 진실한 감정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군요. 물론 그런 감정을 글로 표현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anton99  [date : 2006-06-14]
훌쩍...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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