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횡단열차는 태양을 향해 달린다

(13부)

 GSnJ 이사장 이 정 환

21. 소통에 감동하는 초췌한 할아버지

  이르쿠츠크를 떠난지 20시간이 넘었다. 나지막한 산과 구릉이 자작나무 숲으로 덮여있고 하늘엔 회색빛 구름이 드리워져 빛나는 태양 아래 반짝이던 어제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구름, 산, 구릉, 자작나무, 그 사이 사이로 가끔 보이는 보라색 야생화, 덜컹거리는 기차, 그리고 화병, 꽃, 머그잔, MP3, 조그만 일기장, 이불을 덮고 잠든 아내가 눈에 들어온다. 그냥 아무것도 안하면서 멍청히 창 안팎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야말로 시간 죽이기이다. 그런데 이런 멍청한 시간이 즐겁다. 154시간을 기차를 타고 갔다면 누구나 그 긴긴 시간을 어떻게 보냈냐고 묻지만 잠자고, 졸고, 밥 챙겨 먹고, 긴 시간 정차하는 역에서는 홈에 나가 어슬렁거리며 스트레칭하고 쇼핑(!)하고, 음악 좀 듣고, 책 조금 읽고, 조그만 일기장에 오만가지 것을 시시콜콜 기록하고, 그리고 이렇게 멍청히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보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가고 다음 기착지에 도착한다. 어떤 사람이 안내인으로 나올까? 하는 호기심, 안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잔걱정, 이런 것도 즐거움이다. 아내와 하루 종일 마주 앉아 바라보며 시시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사소한 신경전도 하고, 누룽지에 뜨거운 물을 붓고 변변치 못한 반찬을 가방에서 뒤적여 꺼내 식사를 해결하는 과정도 즐겁다. 왜 즐거울까? 아마도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체험이기 때문이리라. 서두를 일도 정해진 일도 없다. 누구의 방해도 없다. 기차 안에서 하는 일은 다 내가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이고, 일이고, 생활이므로, 그런 일상에서의 일탈(이라고 할까)이 즐거운 것이리라.

  기차 안이 쌀쌀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오는 기차 안은 매우 더웠다. 추운 시베리아만을 생각했으므로 당연히 짧은 옷은 하나도 준비하지 않았고. 그런데 시베리아횡단열차는 창문이 열리지 않는다. 더울 때 시원하게 창문을 열면 좋으련만 그게 안 되었다. 아마 추운 겨울 보온을 위해서리라. 그래서 이르쿠츠크에서 민정이의 안내를 받아 짧은 소매 티셔츠를 하나씩 샀는데 오늘은 짧은 소매 옷은커녕 긴 팔 옷을 입어도 쌀쌀했다. 이런 빗나가는 현실도 즐겁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비디오 장비가 말썽을 부려 소란을 떤 일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노트북 컴퓨터는 이번 여행 내내 그리고 여행이 끝나 서울에 돌아와서도 계속 사건을 일으켰으니 이번 여행을 풍부하게 해 준 가장 큰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이르쿠츠크에서는 멀쩡하게 돌아가던 노트북 컴퓨터를 을 켜자 ‘시스템 디스크를 넣으라.’는 메시지가 뜨고 작동이 안 되는 것 아닌가. 몇 번이나 껐다 켰다 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아니, 이 노트북은 기차 알레르기가 있는 것인가! 그러나 예의 그 컴퓨터 도사라던 그 학생에게 물어보면 해결이 되리라 믿었다. 나는 우선 이근우 교수에게 전화를 해서 민정이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핸드폰은 기지국을 수동으로 선택하자 멋지게 작동하여 이교수와 연결이 되었으므로 지난 번 하고는 상황이 달랐다. 이 교수는 뜻밖의 전화에 반가워하며 민정이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런데 민정이에게 전화를 하자 그녀는 전화가 올 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전혀 놀랍지도 그렇다고 반갑지도 않다는 듯, 아주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별 말없이 그 친구의 전화번호만을 간단히 알려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고맙다는 말을 할 참이었는데... 어색하게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2박 3일간 안내하고 지쳐서 긴 잠을 자다가 일어나서일까? 감정이 어긋난 것이 조금 허전하고 당황스러웠지만 당장 노트북 문제를 해결해야 하므로 서둘러 컴퓨터 도사를 찾았다. 그렇게 어렵게 겨우 연결된 예의 컴퓨터 도사는 나의 전화를 받고 아주 이상하다는 듯 ‘전 그 노트북 아무 것도 안했는데요. 그냥 켜니까 됐거든요. 글쎄요, 왜 그럴까요? 한 번 껐다 켜 보세요. 그럼 될지도 몰라요’ 이렇게 황당할 수가 있나.

  저녁 5시 40분 마린스크에 도착했다. 홈에는 먹을 것을 파는 행상들이 늘어서 기차가 도착하는 것을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토마토와 오이, 빵, 찐 계란, 오이절임 등을 샀다. 그 때 아주 행색이 남루한 할머니가 찐 감자를 비닐봉지에 몇 개씩 담아 파는 것이 보였다. 아내는 덥석 두 봉지를 집어 들었으나, 나는 왠지 좀 거림직한 생각이 스쳐 순간적으로 아내를 잡아당겨 기차로 돌아왔다. 아내는 찐 감자를 못 산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여지껏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은 다 잘 사먹다가 별안간 내가 사려는 찐 감자는 안 된다니 무슨 심술이냐.’ 라고 비난했다. 나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왠지 불결할 것 같아서...’라고 했으나 아내의 말대로 일관성이 없어서 설득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일단 오이를 고추장에 찍어 맥주와 같이 먹은 후 나는 지난번처럼 따끈한 밥을 지어 아내의 아쉬움을 달래려고 햇반 두개를 들고 승무원 방으로 갔다. 그런데 이 기차에는 승무원 방에도 전자레인지가 없는 것이었다. 일이 제대로 안되려니 다 도움이 안 된다.

  나는 아내에게 식당에 가서 감자 요리를 시켜 먹자고 회유하여 식당으로 갔다. 영어로 된 예의 그 낡은 메뉴판에서는 감자요리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일단 쇠고기 요리를 주문하고 손가락으로 식탁위에 둥그런 모양을 그리며 ‘포테이토’라고 하자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내가 다시 한번 둥그렇게 그림을 그려 설명하였으나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하고 일단 돌아갔다. ‘그냥 돌아간 건 무슨 뜻일까? 과연 감자요리가 나올까? 혹시 계란 후라이나 찐 계란을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한참 후 그녀는 쇠고기 볶음에 감자 후라이가 수북이 담겨있는 접시를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너무 반가워 ‘스빠씨버’를 반복했다. 도대체 이 아가씨가 내 이야기(?)를 알아들은 것이었을까, 우연히 감자 후라이가 곁들여 있는 쇠고기 요리였을까? 지금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접시를 날러오면서 짓던 표정이 ‘이것 맞아요?’라고 묻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만족해하자 그녀도 만족해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고 믿으며, 이 소통의 경험이 가장 즐거운 기억에 하나로 남아있다.

  소통의 즐거움 때문일까 우리는 보드카를 한 병 시켜 마시며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쇠고기 볶음은 입에 딱 맞았고 감자 후라이도 불만이 없었다. 해가 지는 듯 창밖이 어두워지고 구름이 드리워진 서쪽 끝 하늘은 석양빛이 구름에 비치어 희끄무레하게 빛난다. 그리고 점점 더 어두워지며 신비감을 더해 갔다. 이렇게 또 시베리아횡단철도의 하루는 저물어간다!
  방으로 돌아와 ‘못난 미련’ 때문에 다시 노트북을 켜 보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컴퓨터가 제대로 부팅되고 아름다운 윈도우 화면이 뜨는 것 아닌가!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준비해간 DVD 중에서 ‘공공의 적’을 꺼내 드라이브에 걸었다. 기차는 시베리아의 밤공기를 가르며 달리고 우리는 설경구의 걸직한 욕지거리가 너무나 자연스러워 영화에 몰입했다. 그리고 강 형사의 일에 대한 열정과 집념이 깊은 감동으로 밀려왔다. 그러나 아들의 패륜과 처참한 육친 살인 장면이 이어지고, 죽어가면서도 그 패륜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들의 손톱을 삼키는 어머니의 사랑에 깊은 한숨이 나왔다. 시간이 어떻게 됐을까. 이제  이 밤이 지나면 동양과 서양,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한다.

  예카테린부르크까지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커피와 어제 사둔 빵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우리는 노트북을 켰다. 그 유명한 Three Tenors의 크리스마스 공연 실황 DVD를 드라이브에 걸자 가슴 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노래 소리가 조용히 작은 방안에 퍼졌다. 오늘도 날씨는 흐리고 구름이 짙게 깔린 것은 아니었으나 가끔 빗방울이 떨어져 창문을 타고 흘러내린다. 방안엔 테너 가수의 떨리는 노래 소리가 흐르고 창에는 빗줄기가 흘러내리고. 나는 ‘그래, 본래 계획은 이런 것이었단 말이다.’ 라고 중얼거려 본다.

  이르쿠츠크를 떠난 지 45시간이 지나 이제 7시간이면 예카에 도착한다. 그리고 예카에서 26시간만 달리면 모스크바다. 긴긴 시베리아 횡단이 끝나가는 것이다. 만 이틀간 기차만 타고 달려 몰골은 초췌하기 그지없는데 뭔가 벌써 아쉬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모든 것이 다 정상이고 익숙해지고 소통도 되었는데 이제 끝나가는구나! 이런 성급한 기분에 젖어 있는 사이 기차는 시베리아 최대 도시 노보시비르스크(내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가슴을 조이며 아이들을 생각했던 곳)를 지나 오베강을 건넌다. 오베강은 시베리아를 종단하여 북극해로 흘러드는 강의 하나다. 바이칼의 유일한 출구 앙가라 강을 끌어안고 북극해로 흐르는 에니세이강, 바이칼을 둘러싼 눈 덮인 산맥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레나강과 더불어.

  예카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역인 튜멘 역에는 장사꾼이 하나도 없이 홈은 썰렁했다. 우리는 비가 개어 햇살이 화창하게 내려 쪼이는 홈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횡단열차의 종점이 가까워 오는 것을 아쉬워했다. 일본인 노부부는 예카에 내리지 않고 모스크바까지 직행하므로 이제 헤어져야 한다. 그동안 좋은 친구가 되었고 러시아인 가이드를 동행하고 있어서 긴급할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다는 것이 커다란 마음의 힘이 되었으므로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래서 우리는 점심을 같이 하기로 했다. 노부부는 70이 넘었으나 여행광이었다. 점심을 먹으며 그동안 다닌 곳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러나 분명히 으스대는 기분으로 이야기 했고 아내는 일일이 대꾸하며 들어 주었다. 창밖에는 보라색 야생화가 군락을 이루어 피어있고 흰 나비가 모여들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보라색 꽃은 우리나라 뱀꽃 같아 보였으나 아무튼 꿀이 아주 많은 듯 나비가 몇 마리씩 붙어 앉아 있는 모습이 차창을 흘러 지나간다. 가이드인 러시아 처녀 유리나는 바이칼도 처음이었지만 모스크바도 처음이라며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런데 그녀를 더 설레게 하는 것은 할머니와의 상봉이었다. 그녀의 할머니가 예카에 사시는데 벌써 7년간 만나지 못했단다. 그녀가 이곳을 지난다는 소식을 듣고 손녀를 만나러 홈으로 나오기로 되어 있다며 그녀는 정말 상기된 표정이었다. 

  예카에는 예정보다 40여분 늦게 도착했다. 홈에는 훤칠한 키에 아주 잘 생긴 청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도착 전부터 문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유리나는 기차가 서자마자 뛰어내려 할머니로 보이는 노인에게 달려가 끌어안고 펑펑 눈물을 흘린다. 러시아인들은 우리나라와 같이 가족에 대한 끈끈한 정이 깊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 외에도 여러 명의 친척, 아마도 큰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혹시 고모, 과 연이어 끌어안고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 우리는 일본인 노부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우리의 새로운 안내인 함창운씨와 같이 홈을 빠져 나갔다. 유리나는 우리의 존재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