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열차는 태양을 향해 달린다
(9부)

GSnJ 이사장 이 정 환

16. 기차는 바이칼 호반을 달리고
 
  6월 2일 아침, 어제 저녁노을이 가득하던 창문에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비친다. 기차는 서쪽으로 달리지만 기차의 진행 방향은 수시로 바뀌어 노을 지던 창문에 아침햇살이 비추고 다시 노을이 진다. 마침 기차는 실카강을 끼고 달리고 강물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강과 초원과 낮은 산이 어우러져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워 넋을 잃고 바라보며 지나간 일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앞으로의 일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지금 보석처럼 빛나는 이 실카강은 하바로프스크에서 보았던 아무르강, 바로 흑룡강의 상류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까지 흑룡강의 상류를 찾아 하바로프스크에서부터 이틀 밤낮을 달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우리는 하얼빈의 송하강 철교를 지나 북쪽으로 달려온 만주횡단철도와 만난다. 두개의 거대한 철길, 시베리아횡단철도와 만주횡단철도가 ‘치타’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조금 더’가 자그만치 10시간이지만) 가면 다시 울란바토르에서 몽고 초원을 가르며 달려온 또 하나 동북아시아의 동맥, 몽골횡단철도와 만난다. 거기가 우리 민족과 뿌리가 같을지도 모른다는 북몽고족 계통의 알타이어족 부리아트족이 북적인다는 울란우데이다. 

  손에 잡힐 것 같은 이 실카강이 뮤지컬 ‘불의 검’의 배경이 되었던 전설의 강이라는 사실이 감성을 자극한다. 우리는 전설의 실카강을 망연히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본다.

  ‘아무르족의 아름다운 처녀 ‘아사’는 크게 몸을 다쳐 이 실카강가에 쓰러져 있는 한 청년을 구해 살려낸다. 그는 깨어났지만 기억상실로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 아사는 그에게 ‘산마로’란 이름을 지어주고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만 다른 부족과의 전투에서 헤어지고 만다. 목숨을 건진 산마로는 다시 예전의 기억을 되찾고 아사와의 기억은 잊어버린다. 산마로는 자기를 찾아 천신만고 끝에 다시 나타난 아사를 알아보지 못하고 둘의 사랑은 안타까운 운명에 빠지지만-------'

  창밖에는 마을이 자주 나타나고 가끔 무너져 가는 집과 쓰레기 더미도 보인다. 목책도 보이고 방목하는 소떼도 있고 구불구불 신작로도 보인다. 중부 시베리아의 큰 도시 치타와 울란우데가 가까워 오며 사람의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자작나무가 적어지고 전나무 숲이 많아지며 창 밖 풍경은 또 다른 모습을 선사한다.

  아침은 끓는 물에 넣은 누룽지와 깻잎, 그리고 예의 고추장 볶음으로 산뜻하게 끝냈다. 어제 어느 역에선가 사 두었던 삶은 계란 두개는 덤으로 먹었다. 우리는 각자 책을 펴 들었다. 책을 읽는다고 여러 권을 준비했는데 나는 ‘다빈치 코드’밖에 읽지 못했다.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밥 준비하고, 오래 정차하는 역에 내려 스트레칭하며 풍물 구경하고, 잠시 침대에 누워 기차의 율동을 즐기며 눈을 붙이고. 그렇게 시시하게 시간이 갔던 것이다. 나는 베스트셀러가 된 ‘블루 오션’을 꺼내 들었고 아내는 아들아이가 권한 ‘미들섹스’를 폈다.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열어보니 일본인 노부부의 남편이 사탕을 한 봉지 들고 와서 권한다. 고맙게 받고 우리는 하바로프스크 중앙시장에서 샀던 커다란 멜론을 나누어 먹기로 했다. 그리 잘 익지는 않았지만 맛은 상큼했다. 노부부는 귀한 물건이라며 즐거워했고 한 쪽을 승무원 방에 갖다 주니 함박 미소를 짓는다. 음식을 나누어 먹는 즐거움이 쏠쏠했다.
 
  문득 눈을 들어 복도 쪽 창을 보니 막 새순이 나오는 자작나무 숲 너머로 흰눈이 덮인 높은 산봉우리가 보인다. 그 신비한 색의 조화에 우리는 탄성을 지르며 복도로 뛰어나갔다. 우리의 수선에 일본인 노부부와 가이드 처녀 유리나도 무슨 일이냐며 복도로 나왔다. 그들도 사진을 찍으며 감탄하고 있는데 여자 승무원이 다가와 손짓을 한다. 그녀는 복도 창문 중 커튼을 완전히 열어 젖혀 전망이 제일 좋은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 아닌가. 이 무뚝뚝한 여자가 왠 친절! 덕분에 우리는 그 절경을 가장 좋은 곳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문득 바다같이 넓은 호수, 바이칼 호수가 나타났다. 기차는 호수의 바로 곁을 달리고 맑은 호수 물이 손에 닿을 것 같다. 깊이가 1,742미터나 된다는 호수, 수심 40.5미터까지 들여다 보일만큼 맑다는 호수, 우리 민족의 기원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호수를 끼고 기차는 달린다.
    
17. 나는 바보가 되고
 
  드디어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릴 만큼 아름답다는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역 홈에는 한국 여학생 하나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띠우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애교 있고 상냥해 보이는 대구 아가씨였다. 김민정이라 했다. 4년 전 이 곳에 와서 내년이면 러시아 언어학 석사를 마치고 귀국할 예정이란다. 처음 왔을 때는 어두워지면 무서워 방안에 틀어박혀 울기도 많이 울었다는 이 가냘픈 여자 아이가 겨울에는 영하 30도를 오르내려 얼굴을 내놓고 밖에 나올 수도 없는 혹한의 도시에 아무 연고도 없이 단신으로 왔다니. 하바로프스크에서 만났던 여학생에 이어 나는 다시 한번 ‘조선 여자’의 남다른 강인함에 감격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그런 강인함으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를 보호하며 키우고 공부시켰던 것이리라. 한국인의 우수성은 그 어머니들을 통해 이어지고 길러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민정이에게 나는 우선 우리 노트북이 고장인데 고칠만한 곳이 있겠느냐고 물었다. 컴퓨터를 아주 잘하는 한국 학생이 있으니 고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아 살았구나! 내친 김에 사실은 잘못해서 MP3의 음악이 다 지워졌다고 하자 음악을 정말 좋아하는 학생이 있으므로 그 아이에게 부탁하면 다시 녹음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란다. 모든 문제가 다 풀리는 것 같았고 민정이가 구세주 같이 보였다. 민정이는 아는 것도 많았고 이야기 솜씨도 뛰어났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르쿠츠크는 제정 러시아시대 중국과의 무역 중심지로 크게 번성하였으나 공산혁명 후 쇠잔하였다가 최근 다시 중국과의 무역도시로 부상하고 있어요. 그러나 중국 물건이 시장에 넘쳐나고 중국인들이 시장의 상권을 장악하자 중국인에 대한 반감이 점점 높아져 중국인의 활동을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구는 60여만명 되는 큰 도시이긴 하지만 정규대학이 10개, 전문대학이 30여개나 되어 인구의 10%는 학생일 거라고 하죠.”

민정이는 말을 이어 갔다.

“여기는 겨울에 정말 밤이 길어요. 기온은 영하 30도로 떨어지고 4시면 어두워져 자도자도 밤이지요.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저녁에는 극장이나 음악당에 갑니다. 긴긴 밤을 보내기 위해서랍니다. 그래서 공연장이 10개가 넘고 매일 저녁 공연이 이어지지요. 발레나 인형극과 같은 러시아의 공연문화는 긴긴 겨울밤을 보내기 위한 지혜의 산물이라고도 합니다.”

‘불루 오션’에 보면 고급 레스토랑과 영화관은 대체재이고 경쟁산업이라고 했던가. 저녁시간을 즐겁게 보내게 해주는 상품이란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시간을 보람 있고 즐겁게 보내는 것이 바로 행복이고, 그런 의미에서 시간을 즐겁게 보내게 해주는 산업, 그것의 수요는 무한할 것이다. 민정이의 이야기와 블루 오션의 이야기기가 어우러지며 나는 무언가 새로운 깨달음에 이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비즈니스센터라는 국제회의 시설에 짐을 풀었다. 시설은 깔끔하고 프런트의 직원들은 영어가 능통했다. 민정이는 우리를 산사나무의 흰 꽃이 만발하여 늘어선 앙가라 강변으로 안내했다. 앙가라 강은 이르쿠츠크 가운데를 흐르는 강으로 서울의 한강만큼이나 커 보이는데 바이칼호수에서 흘러나오는 강이다. 바이칼 호수로 흘러드는 강은 크고 작은 것을 모두 합치면 330여개나 되지만 바이칼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앙가라 강 단 하나 뿐이란다. 저녁 노을빛을 받은 앙가라 강변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나와 산책하고 있었다.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걷다가 스스럼없이 키스를 나누기도 하고. 그런데 신가한 것은 젊은이들이 거의 모두 맥주 한 병씩을 들고 병 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맥주를 음료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침부터 교내에서 맥주를 마시며 걷는 모습도 자주 본단다. 우리가 민정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걷고 있는 동안 시베리아횡단철도를 건설한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상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거기서 사진 몇 장을 찍고 서둘러 호텔로 돌아왔다. 왜냐하면 거주등록증 없이 나왔으므로 자꾸 불안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항상 거주등록증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어느 곳에 가든 호텔에 도착하면 우선 여권을 맡기고 거주등록을 신청하여야 한다. 등록증 없이 돌아다니다가 보안경찰에 걸리면 곤욕을 치른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런데 등록증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리므로 우리는 괜찮을 것이라는 민정이의 말을 믿고 그냥 나왔던 것이다.
 
  호텔에 도착하자 우리는 문제의 노트북과 MP3를 민정이에게 주고 우선 집으로 전화를 했다.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다고 아이들이 반갑게 받는다. 핸드폰이 안 되서 전화를 못했다고 하자 자기들이 로밍 서비스 회사에 전화해서 알아보고 연락을 해 주기로 했다. 나중에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핸드폰 메뉴에서 ‘네트워크 설정’을 찾아 수동으로 바꾸면 연결 가능한 기지국이 뜬단다. 그 중에 하나를 골라 클릭하면 될 거라고. 딸아이의 말대로 해보니 정말 연결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간단한 것을 모르고! 바보같으니라구!’ 아내가 그렇게 말하고 싶은 모양인지 피식 웃는다. 아마도 시베리아에는 지역마다 이동통신사가 다르므로 그때그때 수동으로 바꾸어 주어야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설명을 안 해 주었으니 내가 알 수가 있나! 아무튼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좋은 것 아닌가.

  저녁식사를 하러 고려인이 경영한다는 ‘서울 이르쿠츠크’라는 한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아주 깨끗하고 정갈하게 식탁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가지나물, 생선튀김, 두부구이, 미역줄기 무침 등등 하나하나가 다 입에 맞았다. 보드카 한잔을 곁들여 우리는 정말 만족스런 만찬을 즐겼다. 호텔로 돌아와 우리는 정말 기분 좋은 날이라며 침대에 누워 한참이나 웃고 떠들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민정이는 컴퓨터를 들고 왔다.

“잘 된데요.”
“어떻게 했는데? 뭐가 고장이었데?”
“그냥 켜니까 되더래요”
“그냥 되더라구? 무슨 소리지?”
“아무 고장 아니래요”

귀신에 홀린 기분이다. 분명히 안 되었는데 그냥 켜니까 되더라니! 나는 졸지에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때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아무튼 잘 됐네요”

아내의 말에 뼈가 있어 보였다. 어제 핸드폰에 이어 노트북도 전혀 문제가 아닌 것을 안된다고 법석을 떨고 가방에 쳐 박아 두었단 말 아닌가! 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반가우면서도 난감한 나의 마음을 아는지 민정이는 얼른 다음 화제로 말을 돌렸다.    

“그리고 MP3에 음악을 180곡 넣었어요. 충분하지요.”

충분하고말고. 더 무슨 말을 하랴. 이렇게 해서 나는 완전히 바보가 되었지만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잘 됐네요’ 나도 속으로 중얼거릴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