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열차는 태양을 향해 달린다
(7부)

GSnJ 이사장 이 정 환

11. 잠자는 아내를 보며

  온몸이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으며 녹아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이중으로 잠근 방문의 손잡이가 빙그르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라 바라보는 사이 방문이 열리고 예의 건장한 사나이 둘이 주저 없이 걸어 들어와 우리의 짐을 들고 나가려는 것이 아닌가. 몸을 일으켜 보려 했으나 도무지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나마 왜 우리 가방을 가져가느냐고 물어보려고 했으나 혀가 굳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리를 짧게 깍은 사나이들이 짐을 다 들고 나가는 순간, 번뜩 희미한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꿈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잠재적인 불안감으로 악몽을 꾸었던 모양이다.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누운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은 어둡고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호텔이 아주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으므로 자동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정말 방문이 열릴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데 문득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노트북의 어슴푸레한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음악을 듣는다고 CD를 걸어 놓은 채 잠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먼저 잠이 들었고 아내도 아마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음악소리는 나지 않고 화면에는 무슨 메시지가 잔뜩 떠 있었다. 마우스를 움직여 보았으나 아무 반응이 없다. 하는 수 없이 일단 전원 스위치를 내려 끄고 시계를 보니 4시였다. 머리가 무거웠으나 다시 잠을 청했다.

  아침 식사는 역시 어제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룸서비스를 해주어서 커피와 같이 빵 한 조각을 먹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호텔은 객실 수가 50여개 밖에 안 되는 하바로프스크의 최고급 호텔이었다. 그리고 마침 엘리베이터를 교체하는 공사를 하고 있어서 빙빙 돌아가야 했던 것인데 공연히 겁먹은 내가 벌벌거린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그 호텔은 마피아의 두목이 조용히 묵는 곳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많은 관광객이 북적거리는 호텔이 편안할 터인데 최두칠씨가 너무 깊은 배려를 한 것이 악수가 난 꼴이어서 미안하지만 원망스럽다. 그러나 어찌 보면 여행은 이런 일을 겪는데 재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아침 9시 25분, 기차가 하바로프스크 역을 출발한다. 최두칠씨는 홈에서 아주 아쉬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그의 성심과 정이 느껴져 왔다. 그는 기차가 출발하고 멀어질 때까지 홈에 서서 우리를 배웅했다. 객실은 지난번 기차보다 더 깨끗하고 장식도 고급스러웠다. 얼마 안 되어 기차가 다시 시베리아 초원으로 나섰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흩어져 있고 초원은 끝없이 이어져 그 끝에서 나지막한 야산을 만난다. 여기저기 실개천이 흐르고 흰색, 노란색, 남색, 분홍색 들꽃이 흩어져 피어 있다. 가끔 조밥나무로 보이는 나뭇가지에 작은 흰 꽃이 다닥다닥 만발하여 녹색의 풀밭을 배경으로 자태를 뽐내고 있어 그 화려함이 눈부시다. 아내는 MP3의 리시버를 귀에 꽂고 음악에 따라 흥얼거린다. 딸아이가 연인들이 같이 듣는 리시버라며 사준 것에는 이어폰이 두개가 달려 있어 서로 바라보며 같은 음악을 들을 수 있어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아내는 경치에 감탄하고 먹을 것을 뒤적이며 모든 것이 다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다행이다.

  세 시간이나 지났을까 아내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잠이 들었다. 나는 잠자는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한마디 이의도 없이 고생스런 여행길에 따라 나선 아내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좋아서 오래 전부터 꿈꾸던 여행이지만 아내야 무슨 생각으로 길고 긴, 단조롭고 불안한 여행길을 선뜻 따라 나선 것일까? 남편이 가자니까? 남편을 믿으니까? 나의 걱정과 불안을 모르니까? 사실 아내에게 고생스런 여행이 될 것이란 정도의 운은 띄어 두었지만 상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공연히 아내의 마음까지 불안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필요할 때 아이들이 뜯어서 읽어 보라고 편지를 써서 서재의 책상 위에 놓고 왔지만 아내에게는 그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부모가 일생 처음으로 같이 길고 생소한 여행을 떠나는 터여서 무언가 한마디 써 두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후 먼 여행을 떠날 때마다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곤 한다. 그런 편지를 쓸 때 마다 매우 진지하게 아이들을 생각해 보는 순간이 되어 참 소중한 시간이 된다. 객실 안은 따뜻한데 추운 듯 옹크리고 잠들어 있는 아내를 다시 내려다  보았다. 여행 끝나고 돌아가면 어떤 마음이었는지 물어보리라 생각하며 오늘 있었던 일과 느낌을 작은 노트에 꼼꼼히 적었다. 
 
  기차가 오블르찌예라는 역 홈에 들어섰다. 우리는 다른 승객들과 같이 5시간 만에 기차에서 내렸다. 홈에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기차를 타려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었다. 아주머니, 할머니, 처녀, 총각, 장사꾼들이 빵, 소시지, 찐 계란, 군생선, 만두, 토마토, 음료수, 맥주 등을 바구니나 작은 수레에 담아 팔고 있었다. 기차에서 내린 승객들이 열심히 물건값을 흥정한다. 우리도 찐 계란과 맥주, 생수, 술떡같이 보이는 빵 등을 샀다. 그런데 우리나라 오이지 같은 것을 파는 것이 아닌가. 피클일까? 아무튼 한 봉지를 샀다.
 
  시베리아횡단열차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9,300km를 달리며 75개 정도의 역에서 정차한다. 대부분 1-2분정도 정차하지만 3-4시간마다 20여분 정차하는 역이 있다. 이런 역에서 승객들은 모두 홈에 내려와 스트레칭도 하고 신선한 바람도 쏘이며 기분을 전환하기도 하고, 먹을 것을 사서 다음 식사 준비를 하기도 한다. 객실 승무원 한사람은 홈에 설치된 긴 호스를 이용하여 기차에 물을 보급하고 객실의 쓰레기통을 비우는 사이 또 한 명의 승무원은 객차 입구에 서서 출입자를 감시한다. 그 덕분에 승객들은 안심하고 모든 짐을 객실에 두고 홈에 나와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운행시간이 여행안내서에 나와 있는 것과 반드시 같지 않으므로 기차를 타면 우선 객차 복도에 붙어있는 운행시간표를 보고 긴 시간 정차하는 역을 기록해 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지도를 보며 지금 달리고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긴 시간 정차하는 역이 가까워 오면 내릴 준비를 한다. 물론 러시아 알파벳정도는 읽을 수 있어야 지도와 역명을 맞추어 볼 수 있다. 나도 알파벳과 숫자 세기, 그리고 몇 가지 단어는 공부(!)했으므로 그런대로 요긴하게 써 먹었다.

  주의할 것은 긴 시간 정차하는 모든 역에 먹을 것을 파는 장사꾼들이 많이 나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4시간 반 정도 후에 도착한 베로고르스크라는 역에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장사꾼 밖에 없었다. 그 대신 홈 한편에 매점이 늘어서 있어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을거리를 산다. 아마도 매점이 들어서면서 행상의 출입은 통제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행상이 파는 식품의 위생문제 때문이란다. 그러나 보안 때문인 듯 매점의 창문에는 철창이 쳐져있고 조그만 구멍으로 돈과 물건을 주고받아야 하므로 삭막하고, 물건도 컵라면 등 가공식품 위주여서 실망스러웠다. 따라서 행상이 많은 역에서 충분히 사두는 것이 좋다. 위생문제의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라면. 나는 그런 위험을 감수했지만 아무 탈이 없이 즐겁게 흥정하고 맛있게 먹었다. 거의 대부분 그렇단다. 그러나 여름철에는 위험이 높아질지도 모른다.
 
  객실로 돌아와 우리는 점심식사 준비를 했다. 서울서 준비해 온 큰 머그잔 두개에 끓는 물을 떠다가 한 개에는 누룽지를 넣고 또 한 개에는 컵라면을 넣었다. 누룽지는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적당히 풀어졌고 라면도 훌륭하게 익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산 절임 야채와 햄, 고추장, 구운 김, 술떡과 같이 조그만 식탁 위에 펼쳐 놓자 멋진 오찬 식탁이 되었다. 그 소박한 점심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누룽지와 절임 야채 맛은 나의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았다. 우리는 정말 만족스런 점심을 마치고 다시 음악을 들으며 책을 펴 들었다. 책도 여러 권 준비해갔으나 나는 먼저 다빈치 코드를 꺼내 들었다.

12. 눈물이 날만큼 아름답다는 말이 있었지  

  시계가 오후 3시를 지났다. 내 시계는 모스크바 시간에 맞추어져 있으므로 이곳 시간으로는 저녁 9시경이고 서울 시간으로는 저녁 8시경이리라.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있으면 시간대가 8번이나 바뀌므로 일일이 현지 시간을 쓰면 승객은 큰 혼란을 겪게 된다. 따라서 모든 시간표기는 모스크바 시간으로 되어있고 나도 시계를 모스크바 시간에 맞추었다. 현재 기차가 달리고 있는 위치를 파악한 후 안내서에 나와 있는 지역별 시차를 가감하여 지금 있는 곳의 시간을 알아낸다. 밖은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므로 우리는 맥주도 한잔하고 저녁식사도 할 겸 식당을 찾아 나섰다. 승무원실로 가서 ‘제크로이제, �蔓颯뵀�(문을 잠가주세요)’라고 하자 웃으며 방문을 잠가준다.

  식당에는 러시아어로 된 메뉴판밖에 없었다. 안내서에는 영어로 된 메뉴판이 있다고 했으나 내가 ‘잉그레쉐?’ 라고 하자 마음씨 좋아 보이는 퉁퉁한 남자 점원이 고개를 젓는다. 난감했다. 그러자 그 점원은 마침 식탁보에 그려있는 여러 가지 야채 그림을 가리키며 ‘살라트’라고 한다. 나는 물론 얼른 ‘�蠻캭뵀�(please)’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메뉴판의 한 곳을 가리키며 ‘미트, 미트’라고 한다. 아무튼 나는 다시 ‘�蠻캭뵀륫�라고 했고 그는 아주 만족스런 표정으로 돌아갔다. 키가 180센티도 넘어 보이는 말라깽이 아가씨가 가져온 음식은 야채샐러드와 돼지고기 튀김이었고 맛도 좋았다. 이렇게 소통하면 되는구나!

  맥주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니 태양이 이제 막 서쪽 지평선으로 떨어지며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해는 지평선 위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어린 시절, 해가 서산에 걸렸나 싶으면 순식간에 꼴깍 넘어가 시간의 빠름을 절감하고 아쉬워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쩐 일인지 시베리아 지평선 위의 해는 쉬 지지 않았다. 아, 이 기차가 태양을 향해 달리고 있구나! 기차가 서쪽 지평선 위로 지려는 해를 향해 달리고 있으니 해가 지지 못하는 것이었다. 태양과 기차의 달리기 경주가 한참, 드디어 태양은 서쪽 지평선 아래로 사라졌지만 지평선 위 하늘을 물들인 저녁노을은 계속 되었다. 기차가 달리는 방향에 따라 바른 편 창문 너머로 보이기도 하고 왼쪽 창문 너머로 보이기도 하다가 창문 정면이 노을로 가득 찬다. 눈물이 나올 만큼 아름답다는 말이 있었지. 그렇게 저녁노을은 한 시간 가까이 그 아름다운 장관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서서히 아주 서서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