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에서 만난 삶과 죽음-

제 1부 역사와 예술의 향기, 여기는 오스트리아(1)

GSnJ 농정전략연구센터 소장 고영곤

  인천공항을 오후 두시쯤 이륙한 비행기는 대체로 고도 11,000m, 시속 800Km의 속도로 황해, 중국, 시베리아, 모스크바 근처 상공을 날았다. 지루한 11시간의 비행 끝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 도착한 것은 석양 무렵이었다.

  아, 여기가 비엔나구나! 모차르트·베토벤·하이든·요한 스트라우스 그리고 그 아름다운 화음의 비인소년합창단으로 유명한 음악의 나라, 지금까지 노벨상 수상자를 15명이나 배출한 나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

자유주의 사상을 신봉하여 시장경쟁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현대경제학의 큰 획을 그은 한계효용학파(빈 학파 또는 오스트리아학파)의 거목 칼 멩거와 그 후학 하이에크 미제스 등이 활약했던 비엔나대학, 1365년 설립되었고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의 하나이자 노벨상 수상자를 9명이나 배출하고 히틀러가 두 번이나 미술대학에 낙방한 바로 그 유명한 빈(비엔나)대학이 있는 그 도시에 온 것이다.

이역만리 미국 땅 뉴욕에서 34세의 나이에 59세의 이승만과 결혼한 프란체스카여사도 이곳 비엔나 근교에서 태어났다.

그린칭 마을

  우리는 여장을 풀기도 전에 속칭 ‘술 익는 마을’ 그린칭(Grinzing Heuriger)으로 갔다. 그린칭은 과거에는 비엔나 근교의 포도농사를 많이 하는 농촌마을이었으나 도시가 확장되면서 비엔나 19개 구 가운데 가장 나중에 편입된 지역으로 오늘날에 와서는 전통 음식점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200여 년 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조세프(Joseph) 2세는 농민들이 자신이 생산한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직접 판매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리하여 이 마을은 포도 생산농민들 가운데 부가가치를 높여 포도주를 판매하는 농가가 늘어나기 시작해 자연스럽게 당년산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뜻하는 호이리게 와인(Heuriger wein)의 명소가 되었고, 처음에는 선술집처럼 운영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음식점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음식점 입구 대문이나 현관에 소나무 가지를 걸어놓으면 그 집 포도주가 익었음을 나타낸다니 퍽이나 운치 있고 낭만이 느껴진다.

우리나라 도시 근교의 마을에서도 어떤 특색 있는 전통을 살려가며 이와 유사한 관광농원 단지를 만들어 갈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과 함께 농촌의 전통주 제조와 판매가 조금 더 자유스러워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이번 국회에서 통과될 것이 확실한 도농교류촉진법 제정이 그런 계기를 만들어 줄지 모르겠다는 희망을 가져보았다.

  그린칭 마을은 정말 비엔나 변두리였다.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 나지막한 언덕을 올라 포도밭을 둘러보려 했으나 포도는 수확이 끝났고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이렇다 할 볼거리가 없어 예약된 식당으로 갔다. 소나무 가지가 걸려있는 대문에 이어진 식당 마당은 포도넝쿨로 덮여 있었고 그 밑에 식탁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손님이 많으면 거기서도 식사를 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좁은 문을 거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옛날 농가를 개조한 듯 삐걱거릴 것처럼 오래된 건물이었고 꽤 넓은 홀로 가는 좁은 통로 벽에는 조그마한 사진들이 게시판처럼 붙어 있었다. 사마란치 IOC위원장, 클린턴 미국 대통령, 교황 요한바오로2세의 사진도 보였다. 그런 유명한 분들이 이 식당에서 식사를 했으리라고는 생각 되지 않을 정도로 식당은 허름했고 식탁조차도 비좁게 배치되어 있었다.

  식사를 하는데 두 명의 늙은 악사가 바이올린과 아코디언을 들고 나타났다. 이들은 “안녕 하세요”하고 우리말로 인사하고 우리 일행들 옆에서 연주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아리랑, 도라지타령 등 우리 민요가 아닌가. 한국 관광객이 이곳에 참 많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비엔나에서 새삼스럽게 느껴보는 한국의 국력이었다. 가이드의 코치에 따라 우리가 주는 5유로의 팁을 받고 티 없이 좋아하는 늙은 바이올리니스트(?)의 다소 과장된 미소와 계속되는 우리 가락연주는 일행들의 피로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다. 음식점 소속 악사들의 이런 연주 또한 이 마을의 전통이라니 가히 모차르트의 나라답다.

  사실 그린칭 마을은 천재 음악가 베토벤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베토벤은 20세 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37년간을 비엔나에서 살았다. 전에 잠깐 만난 모차르트의 칭찬을 받고 그 제자가 되기 위해 비엔나에 왔으나 모차르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고, 그냥 눌러 앉게 된 그의 비엔나 생활은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웠던 것 같다. 비엔나에 사는 동안 여든 번이나 거처를 옮겼다하고 당시만 해도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변두리 시골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니 짐작할 만하다. 그는 이 마을에 살던 중 자살하려고 유서를 써 놓고 마당에 내려와 성당의 종소리가 들리지 않음을 이상히 여긴 끝에 자신이 귀머거리가 되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현재 비엔나에 있는 아홉 개의 베토벤 기념관중 3개가 박물관인데 그 중 하나가 이 마을에 있다는데 아쉽게도 우리 일행은 베토벤이 살던 그 집, 박물관을 방문할 시간이 없었다.

링 거리, 창조적 파괴와 통합의 교훈

  우리는 우선 링 거리(Ring street)관광에 나섰다. 원래 비엔나는 중세의 성(城)이어서 이를 에워싼 성곽이 있었고 그 안쪽이 본래의 도시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인구가 늘어나 성안은 비좁고 교통은 복잡해져 성으로 둘러싸인 비엔나는 더 이상 발전의 여지가 없게 된 것이다.

  중세이후 유럽 역사의 한 축을 차지했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국왕 조세프(Franz Joseph)는 1850년대에 이 성곽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라는 칙령을 내린다. 성벽을 헐어낸 바로 그 자리는 도로가 되어 자연스럽게 옛 도심을 둘러싼 반지모양의 순환도로가 생긴 것이다. 결국 이 도로의 안쪽은 과거의 성(城)안이고 바깥쪽은 성 밖인 셈인데 아마도 성 안쪽은 왕족, 성직자, 무사 등 당시로서는 선택받은 자, 힘 있는 자, 가진 자들의 세상이었을 테고 바깥쪽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공간이었을 것이니 150년 전의 성 안과 성 밖은 전혀 딴 세상이었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다.

  성을 쌓는 것은 건설이요, 허무는 것은 파괴다. 이 파괴의 결과로 총 길이 4Km 너비 57m의 도로가 생겼고 과거의 안과 밖은 한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국왕은 이 도로를 따라 대대적인 건축 토목공사를 시행했다.

1869년 개관 기념으로 모차르트의 돈조반니를 공연했다는 오페라하우스, 요한 스트라우스 상이 있는 시립공원(City Park), 1918년 황제가 왕권을 포기하고 오스트리아의 공화국임을 선포한 국회의사당과 국립극장, 시청, 비엔나대학 등의 시설들이 모두 이 도로 주변에 있고 이들은 거의 19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들이라 한다. 그 계획적인 건축 사업은 성(城)의 안과 밖을 통합하여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하나의 도시로 만들고자 함이었으리라. 오늘날에 와서는 건축물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관광자원이 되어 있고 이들 건축물들로 인해 이 도로는 이제 단순한 도로가 아니라 번화가인 이른바 링(ring)거리가 되었으며 비엔나 의과대학 교수였던 프로이드도 이 거리에서 산책을 즐겼다고 한다.

  창조적 파괴라 했던가. 성안에 가두어진 도시를 열어 넓은 세상을 향하게 한 파괴, 그리고 가진 자들의 성 안과 가지지 못한 자들의 성 밖을 통합하려했던 150여 년 전의 결정이 오늘날의 비엔나를 있게 한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리라는 상념에 젖어본다. 사실 이들 건축공사가 진행될 무렵의 유럽은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고, 계몽주의사상, 자연법사상, 자유주의 사상이 시대정신으로 확산되었던 때가 아니었던가. 이런 사상이 그런 결정과 계획의 토대가 되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혁신(innovation)이야말로 모든 발전의 원동력이라며 창조적 파괴’를 강조한 경제학자 슘페터도 오스트리아 출신이고 비엔나대학을 나왔다. 유네스코는 이 링 거리 안쪽의 넓이 371ha의 옛 성 안과 주변의 462ha를 합한 총 833ha에 달하는 현재의 비엔나 중심지역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주마간산으로 링거리를 지나면서 1147년에 지어지기 시작한 그 유명한 스테판 성당에도 들렀다. 하이든이 어렸을 적 소년 성가대원으로 활약했고,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치러지고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그를 죽음에 이르도록 한 살리에르가 오르간 연주자로 활약했던 그 성당, 그래서 영화의 상당 부분이 촬영되기도 했던 그 유명한 성당에 온 것이다. 우리는 감회에 젖어 성당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였다. 우리가 이 성당에 갔을 때, 성당 앞에서는 전날 비엔나에 도착한 현 교황 베네딕트의 방문행사를 앞두고 있는 시간이어서 경찰관들이 부분적으로 통행제한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전혀 삼엄하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대통령 공관이 된 옛 왕궁, 호프부르크 궁전

   링 거리는 순환도로여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가다 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돼 있는 거리를 따라가다 넓고 시원스런 잔디밭 광장이 길 양쪽으로 있고 광장 안쪽으로 굉장히 큰 건물들이 있는 곳에서 버스를 내렸다. 성을 허물어내면서 성 안팎의 통합, 그리고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 흔적이 역력히 느껴졌다.

  호프부르크 궁전은 1279년 이후 이곳을 지배했던 오스트리아의 국왕 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궁전으로 600여 년에 걸친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화를 상징한다. 이 궁전은 한 눈에 보아도 어마어마하게 큰 건물인데 13세기 이후 기존 건물에 이어서 여러 번 증축되었다고 한다. 1279년에 지어졌던 당초 건물이 아직도 남아있는 이 궁전을 가리키며 여행 가이드는 어느 왕이 언제 증축했고 그 앞의 동상은 16세기 초 오스만 트루크(터키)의 침공을 물리친 오이겐(Eugen)왕자를 기념하는 것이고, 어느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이라는 등의 설명에 열을 올리지만 역사와 건축에 어두운 내게는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다만, 1270년대라면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로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 조정이 강화도로 피신을 가고 원나라의 군대와 연합하여 국난을 수습하던 무렵쯤인데, 그 당시의 건물에 증축을 거듭하여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여러 가지 의미로 가슴에 와 닿았다.

  여러 번 증축했지만 광장에서 보면 단일 건물로 이어져 있는 이 건물은 현재 대통령의 관저 및 집무실, 세 개의 예배당, 박물관, 극장, 승마학교, 두 개의 마구간 등으로 쓰인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의 왕궁 아니면 이조시대의 창덕궁이나 창경궁 덕수궁 등이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고, 왕실의 마구간이나 승마 훈련장이 승마학교나 그에 따른 시설로 쓰이고 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당초 건물을 어떻게 설계하고 또 어떻게 지었기에 그것이 가능할까, 이처럼 국내외 관광객이 많은 곳에 별도의 담장이나 경비도 안 보이는데 경호문제는 없을까, 궁금증이 이는 가운데 우리는 광장입구에서 멀리 유서 깊은 왕궁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왕궁 안의 한 채플의 예배에서는 천상의 소리로 알려진 비인소년 합창단이 성가를 부른다고 한다.

  비엔나의 분위기는 정말 이 나라가 아름답고 윤택한 국가임을 느끼게 하고 거리마다 마로니에가 왕성하게 자라 있어 도시 전체가 마치 잘 가꾸어진 공원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뉴브강이 도심을 끼고 흐르는데 서울의 한강에 비하면 보잘 것 없고 물도 흐리지만, 성냥갑처럼 획일적인 서울의 빌딩이나 아파트건물들에 비하면 건물 하나하나가 다 예술작품으로 보이고 고층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여기저기 역사상 유명한 인물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