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빛 하늘에 물들다(14)

GSnJ 연구원 박혜진

이야기 전개에 불 지피기

 동이 터오는 모습이 마치 저녁노을과도 같아 기분이 묘했던 아침시간, 오스트리아에 본사를 두고 있는 세계적인 철강회사 SIEMENS VAI(Voest Alpine)를 방문했던 일, 독일로 날아가 저녁 늦은 시간이지만 독일의 유명한 맥주집 호프브로이를 다녀온 일, 다음 날 BMW 본사에 들렀다 나오는 길에 주변은 온통 BMW 자동차로 가득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던 일, 뮌헨에 축구경기장인 Allianz Arena를 만든 알리안츠를 방문했을 때는 한국에서 온 손님이라고 오히려 더 좋은 대접을 받았던 일, 기업방문의 마지막 주자였던  화학회사 바스프(BASF)에서는 피로누적으로 인해 제대로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잘 못했던 일까지... 이 이틀 동안의 수두룩한 이야기들을 뭉텅뭉텅 건너뛰고, 기억의 시계는 유럽연수 마지막 날, 하이델베르크로 떠나는 버스안의 나로 돌려놓는다.

가는 날이 좋은 날

 10일간의 모든 일정은 끝이 났다. 이제 정말 떠날 일만 남았나보다.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맑은 햇살을 받아 또렷이 눈에 들어온다. 유럽에 와 있는 동안은 흐린 날이 대부분이었는데 막상 떠나는 날이 되니 이렇게 날씨가 좋을 수가 없다. 하이델베르크는 굳이 오려던 곳은 아니었지만, 프랑크푸르트공항으로 가는 길목이라 잠깐 들르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를 공항까지 잘 데려다 주실 가이드는 뾰족구두의 젊은 언니였다. 호텔에서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내내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들려주던 가이드언니의 생생한 가이드 경험담은 그냥 잠을 청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거 같다.
 나중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하이델베르크는 하이델베르크성이 유명한 곳인데 우리에게는 정말 잠깐의 시간밖에 허락되질 않아서 멀리서 쓰윽 쳐다보기만 하고 마지막 점심식사를 푸짐하게 먹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버스를 다시 타기 전 약 30분의 시간. 같이 가셨던 연수단원분들은 한국어가 쓰여진 근처 면세점에서 독일의 유명하다는 일명 쌍둥이 칼을 몇 자루씩 사셨고, 나는 마지막으로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짝꿍 윤경부장님은 남편분의 선물로(사실은 정확한 상품 사진을 프린트까지 해주시면서 남편분이 부탁하신^^;) 만년필을 구입하셨는데, 나중에 한국에 오셔서 알아보니 그다지 싸지 않은 가격으로 산걸 알게 되셨다는..^^:;;;

기록한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

 그러고보니 이 여행기 참 오래도 썼다. 작년 11월부터 썼으니까 거의 11달이 지나간다. 2주에 한 번씩이라고는 하지만 중간에 거른 적도 여러번이어서 더 길어진데다가  점점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 탓에 그냥 지나쳐버리는 얘기들도 꽤 있었을 거 같다.

 슬슬 쓰다가 틀리면 바로 지워버릴 수 있는 타이핑이 더 익숙한 나의 경우, 메모한 걸 활용해 문장으로 완성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워 사실을 말하자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또한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예전에 봤던 모회사의 카메라 광고 카피가 참 기억에 남는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매번 한 편 분량을 겨우겨우 완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온전하진 않겠지만 이 글들이 모여 기록이 되고 '나'의 기억이 되는 거구나 하는.. 그러면서 지난 글들을 읽을 때마다 매끄럽지 못하다거나 조금씩 거슬리는 부분이 눈에 띄는 경우 다시 수정하고 수정하고 했던 게 어쩌면 좋지 않은 방법이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처음 느끼고 생각했던 그대로의 내 모습과는 다르게 기록되는 거 같아서 말이다. 그치만 기록이 전부는 아니기도 한 것 같다. 기록하는 행위에 집중하다 보면 놓치게 되는 게 더 많을 때도 있기 마련이니까... 메모를 하는 동안은 작은 종이 위에서, 사진을 찍는 동안은 카메라 앵글 속에서만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까...

와인빛 하늘에 물들다

 버스는 모두를 싣고 프랑크푸르트로 향하고 있다. 가는 동안 김용운 부장님이 한명씩 호명하면서 출국 비행기 티켓을 나눠주시는데 괜히 기분이 짠~하다. 한참을 비행기 티켓을 쳐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내 눈이 동그래졌다. 그 사이 하늘은 온통 물이 들어 있었다.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와인빛이었다(사진에서는 100% 표현이 되지 않아 아쉬울 뿐이다). 떠나기 전에 예쁜 선물을 받아가는 거 같아서 기분이 좋다.

 '기업문화/경영혁신 해외연수'라는 명목 하에 여기까지 따라왔지만 10박 11일간의 연수내용을 전부 다 담기에 아직 내 그릇은 많이 작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더 큰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도 생겨난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고, 정해진 일정이긴 했지만 기업방문과 여행, 그리고 함께 다녀오신 단원분들과의 인연은 살아가는 내내 내 삶의 원동력이 될 것 같다.

 가장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삶에 지치고 고단한 사람이 아니라 방금 막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여전히 막 여행에서 돌아온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