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빛 하늘에 물들다(11)

GSnJ 연구원 박혜진

프라하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오후 5시라고는 해도 이 곳은 이미 어둑해진 상태. 하지만 내 주변의 건물들이 하나둘씩 뿜어내는 노란빛 조명은 마치 카메라의 렌즈가 이제서야 초점을 잡은 듯 흐릿했던 낮의 모습을 걷어내고 프라하를 또렷이 밝혀주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프라하의 야경이 그렇게나 멋지다는데 방금 전의 약간은 시시했던(기대가 컸던지라..)천문시계를 왼편으로 두고 바라다 본 쪽은 틴성당의 뾰족한 탑과 주변의 불빛이 잘 어우러져 일단은 그 말을 수긍하게 만들었다. 가이드를 따라 구시가지의 좁고 넓은 골목들을 통과해 멈춰서자 광장같은 곳이 보인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저 멀리 보이는 건물(광장 끝에 위치한 세계 10대 박물관 중 하나인 체코국립박물관이란다.)과의 거리를 어림짐작해보면 넓다기보다는 꽤나 긴 거리인 것 같다. “여기가 바츨라프 광장입니다...%$#@!#$%^*&^$... ” 찬바람이 귀를 찌르는데다가 춥기까지 해서 지금 이 순간은 내가 ‘바츨라프 광장‘에 서 있다는 정보밖에는 얻어낼 수가 없었다. 아 춥다. 추워어~ 그리고 별로 시간이 없어 기념사진만 남겼던 이 곳이 역사적인 대사건의 현장이라는 것은 나중에 아주 나중에 알았다.

시내 방랑기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선포,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 침공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1989년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각자의 길을 가기 위해 피 없이 이뤄낸 ‘벨벳 혁명’이라 불린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 이곳 바츨라프 광장이다. 약 750m에 이르는 일직선의 거리가 시원스레 뻗어있는 바츨라프 광장은 원래 19세기 중반까지는 말 시장으로도 불리었다가 1912년 이곳에 바츨라프의 기마상이 들어서면서 바츨라프 광장(Vaclavske Namesti)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바츨라프는 체코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성인의 이름이다. 유럽으로 연수를 오기 전까지만해도 변명을 조금 덧붙이자면 이곳 사정은 전혀 관심 밖의 일이었기때문에 사전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발도장만 찍고 왔다는 게 참 아쉬운 일이었다.

 바츨라프 광장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공식 일정이 끝나고 시내를 벗어나 어제 저녁을 먹었던 동네로 갔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갈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데, 다들 바로 타시질 않고 목적지는 따로 있다는 듯 머뭇거리신다. 나는 생각난 김에 가이드에게 시내에서 환전해도 괜찮냐고 했더니 단호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되도록이면 하지 말라고 한다. 호텔에서 환전하는 것 보다 수수료를 너무 많이 떼어간다는 이유에서다. 유로도 통용되긴 하지만 아까 잠깐 들렀던 서점에서는 유로를 받지 않았어서 약간만 현지 화폐로(코루나) 환전해두는 게 낫겠다 싶었는데 여러번 물어도 안된다고만 하고 시내는 다시 둘러보고 싶고... 급한 마음에 김용운 부장님께 허락을 간절하게 구하기라도 하듯 “정말 환전하면 안될까요?” 한번 더 여쭤보니 웃는 얼굴로 그럼 많이는 하지 말라고 하신다. 헤헤 15년 이상의 베테랑인 부장님의 OK 대답에 천군만마를 얻은듯한 느낌. “수수료 그깟게 뭐 대수라고” 하는 ‘만용’을 얻었다. 숙소로 돌아가실 몇몇분들을 태운 버스는 출발하고 뭐 이제는 묻지 않아도 다시 아까의 구시가지로 다 같이 발걸음을 옮긴다. 지도상에서는 멀어 보이더니만 얼마 걷지 않아서 다시 천문시계 앞에 집합. 천문시계 바로 앞에 있는 카페가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 전도연씨가 나왔던 곳이라며 전망이 끝내준단다. 다 같이 올라가려고 하는데 은은한 불빛에 이끌려 나는 갑자기 프라하의 마지막 밤을 혼자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온통 나의 머릿속은 ‘야경, 야경, 야경’ 으로 가득. 아직 안 들어가신 분들께 혼자 구경가겠다는 걸 알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객으로 보이는데 왠일인지 동양인은 별로 보이지를 않았다. 게다가 시간이 늦어지고 있어서일까 점점 인적이 드물어진다. 동양인 여자 혼자 프라하 밤거리를 헤매다... 라는 기사 한줄이 확 스쳐가려는 걸 마음을 다잡고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지도도 슬쩍슬쩍 보고 걷는 속도에도 신경을 썼다. (그런데 지금와서 생각해보건데 내가 자연스럽게 보이려 했던 행동은 오히려 나를 눈에 띄게 하지 않았을까 싶긴 하다.ㅡ,.ㅡ)

환전의 교훈

 돌바닥길을 발바닥 전체로 느끼며 일부러 좁은 골목들만 골라 돌아다니며 프라하 밤거리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신다. 뭔가 기념이 될만할 걸 사고 싶어 일단 환전을 하러 바츨라프광장이 있는 신시가지로 갔다. 환전할 곳을 쉽게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잠시. 주변엔 환전소가 넘쳐나 오히려 어느 곳으로 갈까 고민해야했다. 처음엔 밖에 써놓은 환율을 보고 가이드가 괜히 겁준게 아닌가 싶었다. 수수료가 별로 비싸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가이드는 괜히 가이드가 아니다. 그냥 아무데나 가서 돈을 내밀자 밖에 써있는 환율과는 너무도 차이가 나는 금액. 하지만 나는 혼자 긴장한 상태라 잘 생각이 나지도 않는 영어단어를 이어붙여 항의해 볼 ‘천군만마 만용’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아 영수증과 직원을 번갈아 꿈벅거리며 쳐다보다 ‘야경’을 위해 터덜터덜 발길을 돌렸다. ㅠ-ㅠ (돌아오면서 환율표를 자세히 보니 ‘당일 최고환율’ 이라고 표시되어 있던 것 같다.) 프라하 시내환전소에서의 환전은 정말 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하지 않는 게 좋다 라고 주의사항 추가!

엽서에 실어보낸 까를교

 지도를 활짝 폈다. 이제 오전에 봤던 까를교를 다시 찾아갈 생각이다. 거리이름으로 찾아가니까 별로 어렵지 않아서 좋네. 시내가 많이 크지도 않아서 금방 까를교가 눈에 들어오는 데까지 도착. 와아아~ 이런이런! 카메라! 카메라! (여전히 호들갑은 나와 떨어질 수가 없다) 예쁜 조명빛을 멀리까지 은근히 내뿜는 저것은 프라하성과 까를교가 확실했다. 전부 카메라 앵글속으로 집어넣고 흔들리지 않게 찰칵. 까를교 입구까지 오니까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까를교가 예쁘게 나온 엽서 한 장과 열쇠고리를 하나 사서 어디서 왔냐고 묻는 오빠같은 아저씨에게 아임 프롬 코리아 라고 대답해주고 싱글싱글 웃으며 다시 차가운 강바람에 몸을 실었다. 밤에 찾은 까를교는 한산했다. 관광객은 드문드문 있고 낮에 상인들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입구쪽으로 걸어나오는 낯익은 검은머리의 남자분들..은 우리 연수단원분들^^ 남자분 세분이서 따로 구경을 오셨나보다. “혜진씨 혼자 왔어요?” 하고 놀라기부터 하신다. 여기서 이렇게 마주치다니 너무 반가웠다. “네 혼자 돌아다녀보고 싶어서요.” 혼자다니니 조심하라는 말씀을 해주신다. 반가움도 잠시. 인사를 나누고 다시 서로의 갈길로 방향을 튼다.

까를교에 발을 내딛었다. 강바람은 매서운데 이상하게 추운 줄 모르겠다.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한국에서의 일상을 떠올린다(사실 바람이 너무 세서 눈도 제대로 못뜬 채 먼 곳을 응시하며 폼잡고 서있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았지만 꼭 한 번은 영화처럼 해보고 싶었다). 이렇게 한가롭게 혼자서 다닐 수 있다는 게 정말 신나서일까 이번엔 까를교 반대편으로 가보기로 했다. 다리를 건너자 상점들이 보인다. 프라하에도 뻗친 맥도날드의 손길. 몸을 녹이려고 따뜻한 커피한잔을 샀다. 자리를 잡고 앉아 조금 전 기념품가게에서 샀던 엽서를 꺼냈다. 언젠가 함께 까를교를 걷고 싶은 마음을 담아 남자친구에게 몇 줄 적어 펜이 번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넣었다.

트램 타기

 밤의 까를교를 정복한 후 마지막 과제는 트램타기. 여행안내책에 나와있는대로 표를 사야하는데 표 파는 곳이 어딘지 당췌 알 수가 없다. 결국 불이 환하게 켜진 환전소로 가 멋지게 생긴 아저씨에게 트램을 타려고 하는데 티켓을 어디서 살 수 있냐고 물었다.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알려주는데 아저씨와 나의 시선이 일치하지 않는 지라 세 네번 다시 알려준 다음에야 약 50미터 정도 앞의 가게인 것을 알아차렸다. 티켓을 사고 정류장에서 버스노선을 확인했다. 잠시 후 트램이 도착하고 꿈에도 그리진 않았지만 아무튼 매우 타보고 싶었던 트램을 우아하게 탔다. 동양인은 딱 나 혼자. 전부 눈코입이 부리부리한 사람들. 내 앞자리와 왼쪽 앞자리에는 남녀커플이 있었는데  한 자리에 같이 앉아 애정행각을 나누고 있다. 아무도 개의치 않아 하는 거 같아 나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하하. 얼마쯤 갔을까 방송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호텔근처 눈에 익은 곳이 보이자 벨을 눌렀다. 바로 전 정거장에서 앞으로 내리는 사람들이 있길래 나도 그렇게 하려다가 앞에서 타는 사람들이 있길래 허둥지둥 뒤로 내렸는데 떠나는 버스 창가를 뚫고 전해지는 나를 향한 시선들에 민망해져서 못본 척 뛰어서 호텔로 들어왔다.

보고싶은 프라하

“혜진씨 어디 갔다 왔어요오~!!”

방문을 열자마자 윤경부장님의 걱정스런 한마디.

나는 분명 혼자 구경다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말씀드렸던 거 같은데, 내가 없어진 통에 다시 찾으러 내려오셨다는 얘기를 하신다. 윤경부장님이 “젊으니까 혼자서 어디 구경하러 갔을 거에요” 라고 안심시켜 드렸다는 얘기도 덧붙여서. 어찌나 죄송해지던지... “시내구경하고 야경보고 왔어요. 걱정시켜드려서 죄송해요. 혼자 꼭 가보고 싶었거든요.” 윤경부장님은 무사히 잘 돌아와서 다행이라며 웃으신다. 그 와중에도 나는 다 같이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다는 부장님께 “저는 트램타고 왔어요” 라고 자랑하는 걸 빼먹지 않는 막되먹은 센스를 발휘했다. 밤마다 이렇게 윤경부장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이제는 그냥 몇 살 터울 언니같은 느낌이 든다. 항상 좋은 점만 얘기해주시는 부장님인....데.... 오늘밤의 윤경부장님은 처음 호텔에 도착했을 때부터 눈에 거슬리던 먼지들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다며 목소리가 커진다. 환경개선의 염원을 담아 방에 비치된 엽서에 고객의 볼멘소리를 장문으로 적어 놓은 후 다른 때 보다 편안하게 잠드신 거 같다. ^^ 프라하의 마지막 날. 기업방문 일정이 없어 편하게 관광만 할 수 있었던 것도 나쁘지 않다. 혼자 눈 못뜨며 맞았던 까를교 위에서의 차가운 강바람은 잠이 드려는 내 머릿속 구석구석을 헤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