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빛 하늘에 물들다(7)

GSnJ 연구원 박혜진 

경계를 알 수 없는 하늘호수

 스톡홀름에서 둘째 날은 오후에 기업방문 일정이 잡혀있어 오전에는 스톡홀름 전경을 보고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신시가를 구경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도착한 곳은 멜라렌 호를 중심으로 스톡홀름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장소였다. 저 넓은 물줄기는 바다가 아니라 빙하호라고 한다. 예전엔 감옥이었다가 지금은 호텔로 사용한다는 건물도 보이고 여름에만 연다는 놀이동산도 보인다. 노벨상 시상식 후 만찬장으로 사용하는 시청사의 위치도 알려줬다. 내일 오전에 방문할 예정이라는 말도 함께. 이제 시청사가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 호수와 바로 맞닿은 광장이 있어 파란 호수를 좀 더 가까이서 볼 수가 있었다. 사진을 꼭 찍어야 한다는 세 군데 지점을 설명해주는 수빈씨 목소리가 너무 강렬해서 안 찍을 수가 없다.^^;

 스톡홀름의 모든 현대식 건물이 모인 세르겔광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신시가는 큰 백화점과 상점들이 모여 있어 쇼핑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해주고 자유롭게 돌아볼 시간이 생겨 처음 들른 곳은 H&M이라는 의류매장이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꽤나 큰 매장이었는데 입구 쪽에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옷들을 양 손 가득 집어 들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치수 확인만 되면 디자인은 신경 쓸 겨를조차 없어보였다. 유명한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옷을 한정 판매하는데다가 우리가 간 날이 마침 한정판매 날이어서 옷이 진열되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나는 윤경부장님과 함께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결국은 서로 동선이 어긋나 아무리 돌아다녀도 만나지지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어차피 쇼핑에는 별로 흥미가 없기도 했고, -사실 스웨덴에서는 아직 유로가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고유화폐인 크로나로 바꿔야했는데(당시 비자나 마스터카드도 없었다.) -호텔에서 환전하는 걸 깜박해서 더더욱 쇼핑을 할 수가 없었기에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기로 했다.

지도는 잠시 접어두셔도 좋습니다.

 유럽으로 출발하기 전에도, 유럽에 있는 동안에도 내가 그 중요한 여권보다도 먼저 챙겼던 것은 다름 아닌 ‘지도’였다. (주객전도라는 말을 이럴 때 써야하나?? 한 번 잃어버려 심장을 슬슬 쓸어내렸건만 원용식팀장님의 정기적인 여권검사에 마음을 놓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새로운 곳에 도착하면 그 곳의 지도가 수중에 챙겨져 있어야 안심! 나중에는 안내소를 먼저 들르지 못해 지도를 손에 넣을 수 없자 마치 금단현상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기까지 해 결국 김용운 부장님(TC)이 자신의 오랜 손때가 묻은 지도를 슬쩍 건네주시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지 뭐...^^;;

 그런데 지도에 집착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사실 하나! 지도가 있으면 내가 있는 곳의 위치가 파악되어 당장은 안심이 됐지만, 마치 좋은 풍경도 사진 찍느라 제대로 눈에 담지 못할 때가 있듯이 지도만 주구장창 따라가다 보니 오히려 곳곳에 숨은 보물 같은 장소를 놓치기 쉽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이번에는 근처만 잠깐 돌아볼 요령으로 내 위치 정도만 파악하고 지도는 잠시 넣어 두었다. 오로지 나의 -뛰어나진 않지만 꽤나 괜찮은 정도의-방향 감각에 의존해 골목길을 내 영역마냥 빠른 발걸음으로 누비고 다녔다. 혼자였기 때문에 어리버리해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똘망똘망한 눈빛도 추가했다. 그렇게 여기저기 훑고 다니다보니 골목길 한 모퉁이에 자리한 카페문틈 사이로 빠져나온 커피향은 어느새 내 콧속의 차가운 공기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달콤함으로 가득 채워주고 있었다.

IT강국 그리고 시스타

 윤경부장님과 서로 어디에 있었냐고 장난 섞인 실갱이를 하고 있는 동안 버스가 출발했고 우리는 한식당에서 맛있는 김치찌개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그동안 ‘스웨덴’ 하면 ‘복지국가’ 가 먼저 떠올랐었는데 이제 그런 생각을 잠시 미뤄두게 할 만한 곳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스웨덴을 IT강국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한 시스타 사이언스 시티. 스톡홀름에서 서북쪽으로 17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미국의 실리콘밸리에 이은 제 2의 정보기술단지로 혁신클러스터의 성공사례로 꼽히는 곳이다. 약 61만평의 면적에 스웨덴을 대표하며 스웨덴 매출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통신장비업체 에릭슨을 비롯해 초일류기업들이 밀집해 있고 스웨덴 왕립공대와 스톡홀름 대학이 공동 설립한 IT대학이 이 곳 시스타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원래 방문예정인 기업 에릭슨으로 가기 전에 잠깐 시간을 내서 IT대학을 들르기로 했다.

 흰색의 그다지 볼품은 없어 보였던 겉모습과는 달리 IT대학에 들어섰을 때 내부는 아주 깔끔했다. 혼자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작은 방에서 함께 토의를 하는 학생들도 보였다. 한 학생이 앞에 나와 칠판에 메모를 해가며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동양인들의 눈빛 공세에 조금 부끄러워 하기도. 너무 조용히 공부중이어서 혹 방해라도 될까 조심조심 밖으로 나와 건물들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규모가 그다지 크진 않았어도 유능한 인재들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하니 아 도대체 공부하는 걸 얼마나 좋아해야 이런 곳에서 공부할 수 있는 걸까? 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해 스웨덴과 IT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연결시켜 본 계기가 되기도 한 방문이었다.

 다음은 에릭슨 본사 R&D센터로 이동. 세계 통신장비 분야에서 40%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기업이다(난 유럽연수를 오기 전까지만해도 왜 이렇게 큰 기업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동안 사로잡혔다).에릭슨은 각종 통신 단말기부터 시스템까지 생산하고 있고 소니에릭슨을 통하여 핸드폰, 멀티미디어 응용프로그램, 부가 서비스 까지 제공한다고 한다. 여행기를 쓰다가 갑자기 궁금해져서 에릭슨과 삼성에 관련된 기사를 한 번 찾아보니 최근 소니에릭슨의 휴대폰 판매가 삼성을 제쳤다는 기사가 먼저 나온다. 에릭슨 측에서 말한대로 취약한 디자인 분야를 소니에릭슨을 통해 상당부분 채워나가고 있는 걸까? 지속적인 연구개발에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이 에릭슨의 경영방침. 질문답변 시간에는 역시나 SK텔레콤에 근무하시는 임근환 과장님의 질문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보물상자 같은 거리

 중식당에서의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갈 시간. 가이드 전수빈씨는 꼭 숙소로 돌아갈 필요 없이 자유시간을 가져도 된다고 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그냥 쉬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런 생각과는 무관하게 발은 이미 버스와는 다른 방향을 향해 있었다. 호텔로 바로 가지 않는 분들이 꽤 많았지만 결국 걷다보니 원팀장님, 박과장님, 윤경부장님, 나 이렇게 네 명이 오늘의 밤마실 팀이 되었다. 저녁을 먹은 식당은 오전에 쇼핑하러 왔던 신시가에 있어서 그 주변은 어렵지 않게 다닐 수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우리 눈에 뜨인 곳은 술가게. 와인, 맥주, 양주 등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종류의 술을 본 건 처음인 거 같았다. 보기만 해도 신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날씨가 상당히 추운데다가 저녁 6시가 조금 넘었는데 날은 완전히 깜깜해졌다. 슬슬 돌아가자는 데는 의견이 모아졌는데 지도를 가지고 넷이서 아무리 머리를 맞대보아도 도통 지금 위치가 어딘지 알 수가 없는지라 박과장님이 지나가는 외국인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일단 숙소 쪽일 거라 짐작되는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길을 물어볼 외국인을 물색해 보았으나 물색만 하다가 결국은 전혀 낯선 곳으로 오게 되었다. 가게들은 거의 문을 닫아 가로등 불빛만이 돌로 촘촘히 박힌 길을 비추고 있을 뿐인데, 그 비좁은 사이사이 골목길과 가로등이 만들어내는 모습은 마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었다.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 벽에 붙어 있는 거리 이름으로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자 그제서야 지도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이 멋진 길에 감탄하기 시작했다. 나는 연신 카메라를 눌러대며 입으로는 “와 여기 정말 멋지네요!”를 연발했다.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발견한 느낌에 너무나 신이 났었나보다.

“스톡홀름에서 마지막 날인데 이 멋진 장소에 다시 못 오겠지요? 우리만 보긴 너무 아까운 곳이에요..”

 칼바람에 녹초가 된 상태로 숙소에 들어갔는데, 원팀장님의 초대를 받아 팀장님이 시내에서 구입한 양주로 몸을 좀 녹였다. 윤경부장님과 우리 방으로 돌아와 여기저기 널부러진 내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내일은 체크아웃을 해야해서 짐을 다 싸가지고 가야한다는 사실이 번뜩 떠오르며 동시에 짐싸다가 늦어버렸던 사건이 다시 나를 괴롭혔다. 부장님께 “내일은 체크아웃하는 날이니 짐을 빨리 싸놔야 겠어요” 라고는 했지만 추위에 정신을 홀라당 뺏긴 탓일까 좀 전에 섭취한 알콜기운 때문일까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간다. 결국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걸로 스스로 합의를 보았다. 오늘은 오랜만에 깊이 잠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