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빛 하늘에 물들다(5)

GSnJ 연구원 박혜진 

부끄러운 사건 하나와 튜울립

 셋째 날은 스톡홀름으로 가는 비행기 시간이 4시간이나 앞당겨져 Royal Dutch Shell을 오전 8시에 방문하기로 해서 7시엔 버스가 출발해야 한다고 절대 늦지 않도록 해달라고 했는데, 아뿔싸! 일찍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짐 싸는 일을 우습게 봤다가 새벽부터 진땀을 뺐다. 정리도 오래 걸렸거니와 가방에 무조건 우겨넣고 확 닫아버리는 방법이 오늘따라 안 통하는 거였다. 흑.. 가방아 제발 닫혀 주거라~ㅠㅠ 이미 7시를 지나 유유히 제 할일을 다 하는 시계를 보면서 분침을 때려눕혀 꽁꽁 묶어 놓고 싶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 옆에서 낑낑대던 나를 보고 윤경부장님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다. 잠깐 살펴 보시더니 양쪽 뚜껑 안쪽의 맞물리는 부분을 정확히 맞춰주니 의외로 간단히 성공. 잽싸게 로비로 내려가 체크아웃. 근데 버스에 올라타고 보니까 윤경부장님과 내가 제일 늦어버린 거였다. 상큼한 아침인사는 물 건너 가버리고 "죄송합니다" 로 시작된 하루.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것이 오늘의 부끄러운 사건 하나!

 가는 동안 현지가이드는 네덜란드의 유명한 꽃 튜울립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막간을 이용한 퀴즈타임. "혹시 네덜란드에서 개발하지 못한 튜울립 색은 무슨색인지 아십니까? 모든 색의 튜울립이 다 있는데 이 색만은 아직 개발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난 번과는 달리 이번엔 정답이 금방 나오지 않았다. "바로 검은색입니다. 혹시 영화 '데이지'에서 검은튜울립을 보신 분들이 있을텐데요, 그건 실제 꽃이 아니라 영화 소품용으로 만든 거라고 하네요." 나름대로 흥미로운 얘기였지만 만약 꽃을 살 일이 생긴다면 왠지 검은색 튜울립에는 손길이 가지 않을 것 같았다. 검은색 튜울립이라..

 
친절한 Royal Dutch Shell

 출근시간대의 심한 교통체증이 걱정되어 가는 동안 약속시간을 8시 반으로 시간을 늦춰 10여분 늦게 도착해 일사분란하게 2층에 위치한 회의장으로 올라갔다. 한 숨 돌리라는 배려인지 회의장 들어가기 전 각종 음료수와 쿠키가 준비되어 있었다. 물은 두 가지가 놓여 있는데, 하나는 탄산이 들어가 마치 김빠진 사이다 맛과 비슷하면서 소주의 뒷맛처럼 씁쓸하기도 한 탄산수이고 하나는 일반 생수이다. 유럽에서는 이 탄산수를 자주 볼 수 있는데 나는 도저히 그 어정쩡한 맛과 친해지기가 어려워 일반 생수를 가지고 들어갔다. Royal Dutch Shell은 네덜란드의 Royal Dutch 석유회사와 영국의 Shell 무역운송회사 2개의 기업을 모기업으로 하며, 원유탐사 및 채굴, 석유생산, 가스, 석탄, 화학 등 에너지 관련 모든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이다. 145개국에 2,500여개의 자회사 및 합작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니 엄청난 규모이기도 하다. 처음엔 회사 이름이 생소했는데, 기업로고 모양이 노란색 조개모양에 빨간 테두리...저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봤는데..아! 예전에 일본에 있을 때 운전하면서 주유소에 Shell 이란 이름과 함께 저 로고가 붙어있던 걸 봤던 게 떠올랐다. 원형테이블에 가지런히 정돈된 발표자료들은 한국어로 준비 되어 있고, 발표도 한국어로 된 파워포인트 화면으로 진행됐다. 이런 배려까지 하다니..
 중간중간 통역자를 배려하던 직원들의 모습과 한국어로 된 파워포인트 발표자료, 안내 책자 등은 내게 참 좋은 인상을 줬다. 다른 연수단원분들도 같은 의견이기는 마찬가지. 비행기 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랴부랴 끝내야 했던 게 못내 아쉬웠다. 인상 좋은 인사 담당자 ‘애나’씨와 기념 촬영을 하는 것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본다. 전날의 하이네켄 방문때와는 왠지 비교될 수 밖에 없던 두 번째 기업방문 완료!

 
부끄러운 사건 둘!

 
 정신 없는 오전시간을 보내고 다음 여행지인 스톡홀름(스웨덴의 수도)으로 가기 위해 스키폴 공항으로 왔다. 버스에서 가방을 내려 손잡이를 쭈욱 뽑아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것도 꽤 익숙해진 거 같다. 이제 수속을 할 차례. 곁에 있던 공항직원이 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부 조그만 비닐팩을 주며 필요하냐고 묻는다. 알고 보니 우리가 유럽에 올 때쯤부터 수화물 단속이 더 심해져 액체로 된 물건은 기내반입금지여서 이 비닐팩에 넣어 짐 검사할 때 전부 꺼내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액체폭탄테러의 위험때문이란다. 혹시 몰라 호텔에서 아침에 몰래 챙겨 온 각종 일회용 잼과 버터도 담고(^^;;) 샘플화장품도 담고 옆에 계시던 수출보험공사의 박세헌과장님으로부터 여행용 고추장도 받아서 넣었다. 사실 이 정도는 그냥 부치는 짐에 넣어놔도 상관 없었을텐데.. 처음이라 너무 긴장했었던 것이다. 여기서 고추장테러범으로라도 잡힌다면 스톡홀름에도 집에도 못 갈 것 같았나보다.

 비행기표도 받고 출발시간까지 여유가 생겨 점심도시락을 받으러 가면서 어깨에 맨 가방을 뒤적이는데, 어? 어? 여권이..없....다! 아무리 뒤적여도 없다. 당연히 비행기표도 없다. 갑작스런 상황에 허둥대는 나와는 달리 옆에서 보고 계시는 분들은 너무나 침착한 목소리로 잘 찾아보라고 하신다. 그 ‘침착한 모습’에 처음엔(죄송한 얘기지만) 내가 두고 간 걸 아시고 장난으로 그러시는 줄 알았다.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아닌 게 확실해졌고 내 표정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없는 거였다. 그 때 TC로 오셨던 김용운 부장님이 저 멀리서 뒷짐을 진 채로 웃으며 걸어오시는 게 보였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기에 같이 웃었다. 뒷짐 진 손으로부터 건네 받은 여권과 비행기표를 보자마자 나를 포함해 함께 걱정하시던 분들까지 이 작은 해프닝이 무사히 끝난 것에 안심했다. 짐 부치는 곳에다 두고 오다니.. 이렇게 반나절 동안 부끄러운 사건을 두 방이나 터뜨리고도 나는 묵묵히 점심도시락을 반갑게 받았다.

 
또 올께, 스키폴!

 
 공항에서의 작은 해프닝 이후로 나는 의도하진 않았지만 결국 '덜렁이'로 찍히고 말았고, 그 때부터 유럽에서의 전체 일정이 끝날 때까지, 가까이에서 아까의 상황을 지켜보셨던 수출보험공사 원용식팀장님의 보호관찰 대상이 되어 아침이면 항상 여권소지유무를 보고드렸다^^;; (팀장님 덕분에 그 이후로는 꼬박꼬박 잘 챙기고 다니게 되었으니 오히려 감사할 따름).

 탑승시간이 가까워 오고 비행 예정시간은 약 2시간. 네덜란드를 다 알 수도 다 볼 수도 없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나의 첫 번째 유럽관문이었던 곳이기에 더 아쉬운 게 아닐까 싶다. 그치만 또 올께, 스키폴! 그리고 또 보자 네덜란드!
 바다를 건너야 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 국경이 맞닿아 있는 유럽안에서는 이웃 나라로 가는 게 어렵지 않아 유럽인들은 왠만한 거리는 그냥 도시간 이동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스톡홀름 공항에 도착했을 때도(물론 이곳은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지만) 특별한 검사 없이 짐을 찾으러 바로 이동했다. 우리를 기다리는 현지 가이드가 궁금해졌다. 이번엔 키가 크고 늘씬한 (윤경부장님의 표현을 잠깐 빌리자면) 패티김을 조금 닮은 듯한 세련된 여자분이었는데, 외모만으로는 국적을 바로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입체감이 드는 얼굴이었다. 다른 분들도 궁금해하셨는지, 아마 그런 질문을 전에도 많이 받았었는지 모르지만, 바로 "저 한국사람 맞아요" 라고 하이톤의 또랑또랑한 말투로 순식간에 분위기를 압도하며 우리 연수단을 공항 밖으로 안내했다. 네덜란드에 있는 동안은 내내 날이 흐려 햇빛을 볼 기회가 적었는데 밖으로 나오니 해가 눈부셨다. 차가운 바람에 몸은 움츠러 들어도 기분은 상쾌하다.

빛의 실루엣에 취하다

 내 기억으로는 오후 3시도 안 됐던 거 같은데 날이 벌써 어둑해지고 있었다. 저녁 먹기 전 먼저 들른 곳은 ‘밀레의 정원’. 이 밀레는 화가 밀레가 아니라 스웨덴의 유명한 현대청동조각가 밀레이고, 정원은 그가 생전에 부인과 함께 살던 집앞에 부인을 위해 꾸민 곳을 말하는 거였다. 집과 정원을 보기 위해서는 커다란 그의 작품들이 세워져 있는 돌로 된 광장 같은 곳을 먼저 지나야 하는 데, 저 멀리 강이 내려다 보이고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서 이 거대한 조각상들이 마주하고 있는 빛이 검은 실루엣으로 변하며 보여지는 아름다운 뒷태가 내 눈을 매혹시켰다. 조금 혼자 걸어보고 싶어 정원쪽으로 올라가니  김한얼 교수님이 계셨다. 사진도 찍어드리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교수님이 물으셨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직접 본 적 있어요?" "아니요. 아직이요." "이 사람 조각상들하고는 다르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놀랐던 게 근육이라던가 심지어 손의 힘줄 하나하나가 정말 섬세하게 표현이 되어 있어서 실제 사람같아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직접 봐요." "아아..그렇군요.. 그럴 기회가 생기겠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 얼마나 정교하게 표현했길래 이리도 꼭 보길 권하시는 걸까? 궁금해지네. 다시 유럽에 와봐야 할 임무가 하나 던져진거 같다^^'

 완전히 어둠에 둘러쌓인 밀레정원을 나와 시내로 이동. 스톡홀름에서의 첫 식사는 호텔의 부페. 우리가 묶을 곳은 아니고 저녁만 먹는 거였다. 현지식이라 입에 맞는 게 적긴 했지만 새로 접하는 음식이니 열심히 먹어보았다.

 여기까지 오늘의 일정도 끝이 나고 이제 아늑한 호텔로 가는 일만 남았구나. 그나저나 오늘 안에 11월 17일날 aT센터에서 여는 대토론회 안내 웹페이지를 만들어야 할텐데.. 금방 끝낼 수 있을까 슬슬 걱정이 된다. 그래 일단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