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빛 하늘에 물들다(4)

GSnJ 연구원 박혜진

다른 시간 속 같은 공간

 하이네켄 본사 방문은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어 그 전에 시내구경을 하기로 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졸렵진 않을까 걱정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에너지가 빵빵하다. 일찍 아침을 먹어서 느긋하게 출발 시간에 맞춰 로비로 내려갔다. 먼저 내려오신 분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안녕하세요. ‘아..이분은 뭐뭐회사의 뭐뭐뭐 부장님’, 안녕하세요. ‘음..이분은 뭐뭐회사의 아..성함이..’ 아직 무리인가보다. 어젯밤에도 확인을 했는데, 다시 단원수첩을 암기해야지.

그런데 어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첫날은 대부분 편한 옷차림이셔서 여행가는구나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이렇게 모두 정장으로 갈아입고 인사를 나누니 처음 상공회의소 간담회때 느꼈던 회의실에서의 그 엄숙한 분위기가 떠오르면서, 우리가 마치 한국의 중대사를 결정할 협상단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잠시 빠져들었다. 12시간을 힘들게 날아와 협상이 잘 타결되어 영화 아마게돈에서처럼 지구를 구하거나 해서 카메라 플래쉬 세례를 받으며 손을 흔들어주는..(@_@;;) 어이~ 어이~ 지금 무슨 생각 하는건가?? 뭐...협상할 건을 들고 온 건 아니지만 선진기업문화를 알고 배우러 왔다는 중요한 목적이 있고 대한상공회의소에서 특별히 조직해 온 해외연수단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유럽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줘야겠다는 각오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버스도 힘차게 출발~

 유럽으로 떠나기 전 전체 일정표를 받긴 했지만 세세한 이동경로에 대한 정보는 얻을 수가 없었던 터라 유럽여행 안내책을 나라별로 뜯어서 항상 들고 다녔다. 아무래도 짧은 시간동안의 현지체험이니 여행책에 나와 있는 관광명소정도라면 충분할 것 같았다(그리고 그 예상은 거의 맞아 들어가 가이드의 설명을 놓치게 될 경우에 꽤나 유용했다).

시내는 별로 멀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니 날씨가 조금 쌀쌀한 듯 했지만 네덜란드 사람들의 평범한 아침 시간을 함께 한다는 사실이 꽤나 나를 기분 좋게 한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위령탑 앞에 모였다. 맞은편에는 담 광장이 있고 이 광장 뒤로 지어진지 350년이 넘은 왕궁이 있다. 원래는 시청사 건물이었으나 19세기 나폴레옹이 통치하면서 이곳을 왕궁으로 썼다고 한다. 지금은 단지 국빈을 맞는 영빈관으로만 쓰인다는데, 이렇게 오래된 건물이 아무렇지 않게 서 있다는 것도, 아직까지 사용한다는 것도 참 놀라웠다. 우리집은 지은 지 20년이 넘어 벽에 금이 가고 있는데 말이다(-_-;).

 여기서부터 중앙역까지 약 7~800미터 정도의 담락거리를 걸었다. 아직까지 들고 간 지도에 익숙하지 않아져서 가이드에게 몇 번이나 내 위치를 물어보았다. 정확히 어디쯤인지 파악이 되자 일년전 혼자 유럽여행을 와서 지금 이 담락거리를 걸었을 남자친구에게 갑자기 이 공기를 전해주고 싶어졌다. 로밍폰 요금에 살짝 걱정이 된 건 사실이지만 그런 건 개의치 않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 몇 번만에 전파는 한국의 휴대폰에 도착. "여기 담락거리에요. 알죠? 담락거리." 나는 신나게 말하는데 뭔가 전화를 받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듯 했다. 이런 운전 중이란다. "그럼 나중에 걸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옆에서 같이 걷던 윤경부장님에게 나의 축 늘어진 표정을 들켰다. "남자친구가 혼자서 여기 여행 왔었거든요."

비록 시간대는 다르지만 왠지 같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랬을까 마음 속에서 뭔가가 가볍게 찰랑거린다. 그리고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을 이 길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그 수많은 사람들은 다들 다른 사연을 가지고 왔을테지. 물론 그냥 지나치는 걸 수도 있고. 그리고 내가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도 또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갔을테고..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다른 시간대에 있지만 결국은 같은 공간에 있던 그 사람들이 왠지 내 옆에서 지금 이 순간 오버랩되면서 함께 걷고 있을 것 같은 느낌. 참으로 묘한 느낌이 잠깐이지만 나를 잡아끌었다.

네덜란드의 또 다른 길 ‘운하’

 조금 서둘러 걷다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데 신호대기로 정지해 있는 저 버스와 버스기사 아저씨가낯이 익었다. 어? 우리 버스랑 아저씨네? 아아..그러고 보니 아저씨는 연수단 일정대로 움직이니 우리가 관광차 걷게 되면 아저씨도 같은 길을 버스로 이동하는 거였다. 재밌기도 하고 나는 괜히 더 반가워서 아저씨에게 활짝 인사를 했다.

슬슬 걸음을 멈춘 곳은 운하가 훤히 보이는 장소였는데, 원래는 일정에 없었지만 시간에 여유도 있고 가이드의 강력추천도 한 몫을 해서 운하관광을 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배를 타는 돈을 어떻게 낼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단장님의 추천으로 강원랜드의 이광훈대리님이 연수단 총무로 급선출되어 앞으로의 부대비용 관리를 맡으셨다. 모두가 배에 탔는지 확인이 끝난 후 출발할 때 쯤 선장아저씨가 지금부터 안내방송을 틀어줄건 데 어디서 왔냐고 물어본다. 나라별 안내방송이 다 있나보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애석하게도 놀~쓰 코리아 안내방송만 있다는 것. 덕분에 네덜란드에서 북한 안내양에게 운하관광안내를 받게 되었다. 평소라면 안그랬겠지만 오늘은 북한사투리가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다. 천천히 미끄러져 나가자 마치 양 옆으로 늘어선 건물들이 배를 내려다 보고 있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운하는 시내를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있었다. 내가 가져간 암스테르담 시내 지도를 보면 분명 길처럼 생겼는데 하늘색으로 표시된 길이 있었다. 이게 운하라는 걸 안 건 꽤 나중의 일이지만 그 만큼 도시의 구역을 나눠주는 역할도 하는 운하는 우리나라에선 전혀 볼 수 없는 새로운 풍경이었다. 더 신기한 건 운하 양쪽으로 늘어선 집들이 조그만 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또 앞은 좁고 뒤로는 길쭉한 형태는 비슷하지만 하나도 모양과 색이 같은 집이 없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슨 인구에 비해 땅이 좁아 자연스럽게 저런 모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긴 서울의 관악구 정도 크기의 땅에 80만명이 모여사는 데다가 운하가 차지하는 면적도 적지 않으니 이해가 갈 것 같다(관악구의 인구는 53만명). 배를 타고 가다보면 운하 가장자리에 묶여 있는 배에 집이 얹어져 있는 걸 종종 보게 되는 데 이것은 수상가옥. 물론 전기도 물도 공급되는 엄연한 집이지만 집을 지을 땅이 없을 때 허가해 줬던 것이라고 한다.

운하관광이 끝나고 내린 곳은 처음의 선착장이 아닌 가산 다이아몬드 센터라는 곳이다. 암스테르담 최대의 다이아몬드 회사 가운데 하나이고 네덜란드는 다이아몬드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한국인 직원이 있어서 세공과정을 자세히 설명해준다. 그리고 다 함께 조용한 방으로 들어갔는데 하나하나 소중히 포장되어 있는 진짜 다이아몬드를 하나씩 보여줬다. 다이아몬드를 가공한 악세사리들도. 근데 다이아몬드보다 더욱 빛나는 게 있었으니 바로 윤경부장님과 사모님들의 눈빛.^_^  (윤경부장님은 내 옆에 계셔서 더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헤헤) 나는 아무리 저 번쩍이는 것을 봐도 흥미가 생기기는 커녕 밥먹을 시간이 돌아왔는지 배가 고프기만 했다. 아직 결혼할 때가 아니어서 그런걸까??

하이네켄 체험 (Heineken experience)

 점심은 중국식당에서 먹고 하이네켄 본사로 이동을 했다. 하이네켄 하면 독일 맥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이네켄 철자 때문에 그런걸까? 아니면 발음때문일지도.. 아무튼 하이네켄은 유럽 내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역사가 100년이 넘는 네덜란드의 양조업체란다. 잔뜩 부른 배를 미처 소화시키기도 전에 버스가 도착했다. 일단 내리긴 했는데 가이드도 그렇고 버스아저씨도 그렇고 좀 우왕좌왕 하는 듯 하다. 방문예정시간인 2시가 다 되가는데 여기가 아닌가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본사가 공사 중이어서 다른 곳으로 이전했는데 한국에서는 분명 새로운 주소를 알려줬지만 가이드 측에서 다시 확인을 안 한 모양이다. 우여곡절 끝에 10여분 늦게 본사에 도착했고, 첫 방문부터 늦어진 게 모두들 미안한 마음임에도 불구하고 하이네켄 측에서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미 프레젠테이션 준비도 다 되어있어서 늦어진 만큼 서둘러 시작했다. 남자 두 분, 여자 한 분이 나와 있었는데 제일 연배가 있어 보이는 분이 설명을 시작했다. 아 높은 사람인가보다. 더 젊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게 조금 수상했지만 다시 설명에 집중하기로 했다(나중에 알고보니 앉아있는 직원이 더 높은 사람이었다).

프레젠테이션은 뉴사우스웨일즈 대학에서 강의하시는 김한얼 교수님의 순차통역으로 진행되었다. 하이네켄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경영방침에 관한 얘기까지 차분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경영에 관해 조금 더 주의깊게 들었는데 끝나고 질문답변시간에 술을 판매하지만 술을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던가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에 대해 비하하는 듯한 광고는 하지 않는 등의 내용을 고객에게 지켜야 할 윤리의 예로 들기도 했다. 내가 경영에 대한 체계화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렇게 어렵다고 느낄 새 없이 오랜만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 가지! 질문답변 시간에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꼰 채 성의있게(?) 답변해 주었던 하이네켄 직원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기념촬영을 끝으로 첫 번째 기업방문은 완료. 바로 하이네켄에서 운영하는 Heineken experience라는 곳을 들렀다. 제목 그대로 다양한 놀거리와 볼거리를 통해 하이네켄을 알리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여러 층으로 되어 있어서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하이네켄의 역사와 맥주 제조 공정을 알 수 있게 했고 처음 입장할 때 받은 동전모양의 플라스틱 칩 3개로는 두 번의 맥주 시음과 한 번의 기념품 교환이 가능했다. 맥주를 마시는 곳에서 이번엔 지난번하고는 다르게 공짜 맥주 좋아요를 가득 쓴 얼굴로 맥주를 받았다. 시끄러운 음악소리 끊이지 않는 맥주, 사람들. 이동하는 곳곳에 하이네켄병 장식과 초록색 조명이 빠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들른 기념품 가게에서까지 하이네켄=녹색의 등식을 완벽히 세뇌시켜주려는 듯 모든 게 온통 녹색이었다. 무료기념품 역시 하이네켄 병모양 케이스 안의 병따개. 이제는 헷갈리지 않고 '하이네켄은 녹색 병에 든 네덜란드의 맥주입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체험’하고 나온 셈이다. 원래 내가 들은 바로는 녹색은 마음을 차분하게 안정시켜주는 색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왠지 오늘의 녹색은 그 반대인 거 같다.

또다른 모습의 암스테르담

 저녁은 네덜란드 음식으로 먹었다. 생선요리였는데, 시장이 반찬이라고 나는 순식간에 먹어 치운 것 같다. 조명도 은은하고 이제 숙소로 돌아갈 일만 남았으니 마음이 편해졌나보다. 오늘 처음 얘기를 나누게 된 분들과 명함도 주고받고 그렇게 조금씩 서로를 알아갔다.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모두들 네덜란드에서 마지막 밤인데 그 유명한 홍등가를 꼭 가봐야하지 않겠냐는 성화 아닌 성화에 가이드분이 특별히 밤시간을 내주셨다. 네덜란드는 마약과 매춘, 동성간의 결혼을 합법화 한 나라이다. 그래서 관광명소 목록에 홍등가가 올려져 있는 게 이상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성관련 물품가게가 일반 음식점이나 가게들과 섞여 있는 걸 보고 또 그런 가게들이 굉장히 많이 모여있는 걸 보고 적잖이 놀라긴 했지만 이게 네덜란드에선 자연스러운 일이라니 받아들일 수 밖에.

함께 하기에는 조금은 낯이 뜨거워지기도 했던 밤 마실이었지만 오전에 봤던 시내와는 또 다른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오니 몸이 천근만근. 오늘은 정말 푹 자야겠다. 내일은 또 어떤 일들이 생겨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