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횡단열차는 태양을 향해 달린다

(15부)

 GSnJ 이사장 이 정 환

23. 불안한 예감은 적중한다.

  이상하게 모스크바행 기차의 출발 시간이 현지시간으로 밤 12시 50분이었다. 왜 이렇게 심야 기차로 정했을까? 서울에서 기차 시간을 일일이 확인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고 자책하는데 성훈이는 가족사우나를 예약해 놓았다며 거기서 쉬다가 기차를 타면 도리어 더 좋을 것이라고 했다. 가족사우나? 어떤 곳이지? 예의 호기심이 동하며 구미가 당겼다. 성훈이의 안내로 찾아간 사우나는 어두컴컴한 거리 한 구석에 있어 겉모습으로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보니 우리만의 전용 욕조와 샤워시설은 물론 큰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당구대까지 갖추어져 있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가족 단위, 혹은 친구들과 같이 이런 곳에 와서 술도 마시고 당구도 치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별안간 귀족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시설은 매우 낡아 지저분해 보였고 물은 미지근했다. 종업원들은 쌀쌀맞고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우리는 어정쩡하게 샤워를 하고 소파에 기대어 뭔가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3시간을 기다렸다. 뭔가 일이 꼬이는 것 같은 예감이 나를 불안하게 했고 아내의 눈길에서도 그런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드디어 밤 12시, 성훈이는 약속한 시간에 정확하게 우리를 데리러 왔다. 그런데 낮에 사용하던 렌트 자동차는 반납했다며 택시를 타고 왔다. 비용을 절감하려는 그의 민첩함이 보였으나,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미리 데워 가지고 있다가 끓는 물을 부어 먹으면 좋다고 두개를 데워 가지고 오는 따스함을 보여 우리를 감동시켰다. 그를 따라 들어선 기차역 대합실은 심야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어수선했다. 사람들의 외침소리, 안내 방송소리,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는 시끌벅적한 순간이 지나 승차시간이 되자 대합실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세 개의 트렁크를 들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 어두운 홈을 따라 걸었다. 홈의 끝 부분은 공사 중이어서 트렁크를 다시 들고 움직여야 했다. 겨우 지정된 객차 앞에 이르자 나이가 든 여자 승무원이 매우 고압적인 태도로 기차표와 여권을 살펴본다. 예카에 도착하기 전 이제 긴 여행이 다 끝나간다고 아쉬워했었지만 왠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할 때와 같은 불안감이 다시 밀려왔다.

  우리의 예감은 적중했다. 객차 안으로 들어서 보니 방은 모두 4인실이었고 좌석번호는 9번째 객실에 있는 36번이 끝이었다. 우리의 좌석 번호 37, 38번이 있어야 할 객실이 있을 자리가 없었다. 당황하여 성훈이가 승무원에게 달려가 문의하자 이 기차에는 2인실이 없고 모두가 4인실이므로 본래 승무원 방이었던 것을 2인실로 사용하고 있단다. ‘그럼 그렇지 방이 없을 리가 있나’ 라고 안도하며 찾아간 방은 아주 비좁아, 침대는 아래 위층으로 되어있고, 창문은 ‘담벽에 제비집 붙어 있듯’ 걸려 있어 창밖을 내다보기도 쉽지 않았다. 가방 세 개를 놓아둘 공간도 없어서 통로에 둘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바로 방 앞 복도에 사모바르가 있고 옆이 화장실이어서 수시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방안을 들여다보므로 방문을 열어 두기가 민망했다. 하는 수 없이 답답하지만 항상 문은 굳게 닫아두지 않을 수없다. 이 방에서 26시간을 지내야한다니.

  아내는 뜻밖의 상황에 당황하고 낙담하여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행사에서 밤 12시 50분 기차를 타게 한 것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지만 이런 방을 예약한 것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기차는 예카와 모스크바 사이를 왕복하는 열차로서 엄밀히 말하자면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아니었다. 아마도 예카에서 하차하는 승객이 없어 횡단열차의 좌석을 확보하기 어려워 예카-모스크바 왕복열차를 이용하도록 한 모양이었다. (이것은 주워들은 여러 정보를 바탕으로 내가 나중에 내린 호의적 결론이지만). 그런데 이 기차도 좋은 점은 있었다. 뜻밖에 컵라면과 생수 한 병을 야식으로 주고 침대 시트도 무료였다. 그리고 다음날 점심때도 돼지고기 요리에 밥을 곁들인 도시락을 주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아내는 시트와 담요를 펴고 누웠다. 나도 좁은 침대에 같이 누워 ‘이것도 지나고 보면 좋은 추억이 될거야. 하루만 고생하면 모스크바니까 마음 편하게 가집시다.’ 라고 위로하는 사이 아내는 잠이 든 듯했다. 나는 사다리를 펼쳐 2층 침대로 기어 올라가 천정에 머리를 부딪치며 담요를 겨우 펴고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얼마만큼 잤을까,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4시간 정도 깊이 잠들었던 것 같았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으나 기차는 덜컹거리며 어둠을 뚫고 달린다. 우리가 시베리아 횡단의 종착역 모스크바를 향해 달린다고 생각하니 잠들기 전의 불안감은 사라지고 몸은 아주 가볍고 마음도 가라앉아 상쾌했다. 기분 좋게 다시 잠이 들었다. 깼을 때는 이미 날이 밝은지 오래된 듯했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내도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날씨는 잔뜩 흐리고 창밖에는 자작나무 숲과 전나무 숲이 번갈아 지나간다. 성훈이가 데워준 햇반에 끓는 물을 붓고 아껴 두었던 깻잎과 장조림 통조림을 뜯어 즐거운 아침식사를 마쳤다.

  노트북으로 ‘쇼생크의 탈출’이란 영화를 흥미진진하게 보고난 후, 이제까지 찍은 디카의 사진을 노트북 모니터로 보니 훌륭했다. 우리는 그간에 있었던 일을 사진을 따라 복기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이르쿠츠크, 바이칼 호수, 예카쩨린부르크, 그리고 여행 중 만난 사람들, 그러고 보니 서울 떠난 지 벌써 열 이틀째가 되었다. 이 기차에서 하루 밤만 더 자고 깨면 내일 아침 모스크바에 도착하고 시베리아 횡단의 대장정은 끝난다. 그렇게 가슴 뿌듯한 기분에 취해 나는 디카의 메모리가 다 되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확인은 안했지만) 이제까지 찍은 사진을 노트북에 저장하고 지워버렸다. (이 행동이 내가 저지른 또 다른 중대 실수였다는 것이 서울로 돌아갔을 때 밝혀졌고 나는 얼마나 후회했던지.)

  6월 9일 아침 핸드폰에 설정한 자명종 소리에 눈을 떴다. 밖은 이미 새벽빛이 가득했고 자작나무 숲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154시간의 기차 여행이 한 시간이면 끝난다. 정말 긴긴 여행이었다. 7일 밤을 기차에서 보냈다. 이제 더 가라면 정말 사양하고 싶다. 특히 마지막 구간의 기차 시설이 엉망이어서 더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러나 ‘드디어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이렇게 해서 9,300킬로미터를 달려 시베리아를 횡단했다. 오랜 동안의 꿈이었던 시베리아 횡단!’ 이라고 속으로 외쳐본다. 불안하고 두려운 시간도 많았지만 다른 어떤 여행보다 즐겁고 특이한 경험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상기된 기분으로 싱글벙글거리면서도 왠지 안내인이 잘 나와 있을까하는 불안감이 마음 한 구석에서 맴도는 사이 기차가 홈에 도착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예감은 적중했다. 역시 손을 들어 우리를 반기는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아무도 없었다. 상기됐던 기분이 싹 가신다. 하차한 승객들이 모두 홈을 빠져나가도록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 걱정했던 일이 마지막에 터졌구나!’ 라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집어 들고 서울의 여행사 담당직원에게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그는 곧 전화를 받고 곧 알아보고 전화를 해 주겠단다. 나는 기다릴 수 없어 다시 이곳 안내를 맡게 되어 있던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사람을 내보냈다며 확인해 볼 테니 기다리란다. 외국인이 이렇게 서성거리고 있는 경우 보안군이 와서 시비를 걸기 십상이고, 어떤 사람도 안내인이 나타나지 않아 역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보안군에 잡아끌려가 돈을 주고 겨우 풀려났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는 되도록 당당한 모습을 하려고 애쓰며 다시 서울에, 그리고 이곳 사람에게 번갈아 전화를 하는 사이 30여분 지났을까 저만치서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뛰어 온 남자는 부모님을 따라 모스크바에 와서 학교에 다닌다는 재윤이란 학생이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도대체 이제서 나타나면 어쩌자는 것이냐. 그 사이 보안군이라도 나타나 우리를 끌고 가면 어쩔 뻔 했느냐.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는가...’라고 퍼 부었다. 말없이 난감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그는 어제 밤 10시 반에야 부탁을 받고 나오는 길이라며 모스크바에는 기차역이 9개나 되는데 횡단열차가 도착하는 역을 제대로 연락받지 못해 다른 역으로 갔다가 전화를 받고 달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화를 가라앉히고 살펴보니 그는 앳되고 아주 착하게 보였다. 이 학생이 무슨 죄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