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횡단열차는 태양을 향해 달린다

(14부)

 GSnJ 이사장 이 정 환

22. 동양과 서양의 경계선 위에서

  처음에는 내릴 역이 가까워 오면 ‘현지 안내인이 제시간에 잘 나올까?’ 불안했다. 또 어떤 사람일까? 도 궁금했다. 안내인이 제시간에 안나오면 당장 호텔을 제대로 찾아갈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묵을 호텔 이름은 그런대로 알고 있지만 말 한마디 안 통하는 택시를 불러 타고 호텔을 찾아 간다는 것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이제까지 안내인 모두가 객차가 도착하는 홈에 정확히 나와 있었으므로 점점 그런 불안감은 줄어들었고(그러나 이렇게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안내인은 항상 성실했으므로 안내인에 대한 걱정도 사라져 가고 있었다.

  예카테린부르크의 안내인 함성훈씨는 키가 크고 잘생긴 청년인데 러시아 여인을 만나 곧 결혼할 예정이라고 했다. 우랄국립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왔다가 사랑에 빠져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접고 이곳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후 지금은 열심히 일을 찾고 있단다. 아, 사랑이여! 하바로프스크의 안내인 최성칠씨도 사랑에 빠져 귀국을 포기하였다고 하지 않았던가! 멋진 한국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꿈인 러시아 여대생이 많다는 민정이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름다운 러시아 여인에 감동하는 한국남자와 성실한 한국남자를 동경하는 러시아 여인, 그들 모두가 행복하기를 빈다.

  호텔방은 19층이고 벽 한 면은 전면 유리였다. 때마침 해가 지면서 구름사이로 저녁노을이 비추고, 예카 시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이찌에치’강과 그 위에 걸린 다리가 그림같이 아름답다. 유럽과 아시아, 서양과 동양의 경계선이 지나고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볼쉐비끼 혁명군에 의해 이곳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동양과 서양, 과연 그 근저에는 무엇이 있는가? 러시아 제국과 볼쉐비키 혁명, 그리고 소비에트의 멸망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이문열은 그의 여행기에서 엘친을 열광하던 젊은이들이 햄버거 문화에 비틀대는 모습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성훈이는 매우 민첩하고 영리했다. 그래서 아주 안심이 되지만 조금은 드라이한 느낌이 들었다. 세상일은 그렇게 항상 양면성을 갖는다. 꼬박 이틀 밤낮과 한 나절, 54시간을 기차에서 보낸 터라 초췌하기 이를 데 없어 우선 따끈한 물에 샤워를 한 후 몸단장을 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그 때의 초췌한 모습을 지난 번 여행기에 실었더니 딸아이가 보고 ‘아빠, 용기가 대단해요’ 라고 메일을 보내와 정말 초췌해 보이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사 지워버릴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성훈이가 근처에 예약해 놓은 러시아식 뷔페식당은 아주 품위 있는 곳이었다. 꽤 깔끔하게 차려입은 손님들이 조용히 담소하며 식사를 하고 있어서 뷔페식당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식사 후 오이 피클과 올리브 절임을 듬뿍 갖다가 생맥주를 몇 잔이나 마셨다. 

  오랜만에 푸근한 침대에 눕자 잠이 꿀 맛 같이 밀려와 다음 날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자고 일어나자 한 벽면 가득히 비 내리는 예카 시내가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우선 동서양을 가른다는 경계비를 찾아 나섰으나 도중에 매우 감동적인 위령탑을 만났다.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스탈린 시절 처형되고 학살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곳이었다. 소비에트 붕괴 후 그 유골 더미가 이곳에서 발견되고 비밀문서에 그들의 인적사항이 알려져 위령공원을 만들게 되었단다. 끝없이 이어진 희생자들의 이름, 그들의 나이를 보니 20대에서 30대까지의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잔혹한 역사 앞에 정말 가슴이 아파왔다. 지금도 그 가족들이 자기의 아들과 딸, 형제의 이름 아래 꽃을 장식해 놓은 모습이 안타까움을 더했다. 고작 이 위령탑의 작은 이름 아래 꽃 한 송이를 달아 놓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이고 유일한 위로라니. 비까지 내려 우리의 마음은 더 없이 가라앉았고 스산했다.

  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비속을 달려 우랄산맥의 정상에 올라 동서양을 가른다는 경계비에 이르렀다. 우랄‘산맥’이라 하지만 우리의 백두대간 같은 험준한 산이 아니라 넓은 도로가 뚫려있는 높은 언덕 정도여서 초등학교 때부터 신비감을 품어왔던 산맥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했다. 그렇지만 가운데 선이 그어져 있는 경계비 양편에 서자 우리 부부는 동양과 서양, 유럽과 아시아에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도취되어 소리쳐 아내를 불러보았다. 그런데 우리를 실망시킨 것은, 이 경계비는 최근에 만들어 진 것이고 본래의 것은 샛길을 따라 더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었다. 한참을 더 가자 모습이 더 초라한 본래의 경계비가 나타났다. 새로 큰 도로가 뚫리면서 길에서 보기 좋은 곳에 다시 만들었다고 했다. 그럼 어디가 진짜 경계지? 라고 묻자 성훈이는 본래 동양과 서양의 경계는 엄밀한 선이 있는 것이 아니란다.

“역사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 대한 다양한 생각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 에게해와 흑해가 양 문화를 가른다는 생각은 아주 옛날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까지 미지의 땅이었던 시베리아를 동서양으로 나눈 것은 18세기 초 다찌세프라는 지리학자라고 합니다. 그가 우랄산맥을 경계로 문화의 차이가 있다고 정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우랄산맥의 정상 분수령이 상징적 경계선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국경선과 같은 엄밀한 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훈이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렇겠군, 동양과 서양이란 것이 개념적인 것인데 어떻게 기하학적 선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경계비는 상징이지. 그 선의 양편에 서서 감격스러워 한 것이 우스운 일이지.’라는 생각이 들며 별안간 모든 것이 시시해져 버리고 말았다. 

  점심을 먹은 일본식당은 러시아 사람이 일본에 가서 모든 시설자재를 사다가 지었다는데 아주 고급스럽고 일본스러웠다. 여종업원들은 모두 러시아인인데 일본 기모노를 맵시있게 입고 있었고, 주방의 요리사도 러시아인이지만 음식은 일본식으로 나무랄 데가 없었다. 외국에 가서 보면, 이번 여행을 포함해서, 한국식당은 대부분 허름하고 무언가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한국 음식문화를 좀더 품위 있고 세련된 모습으로 알릴 수 있는 고급식당이 많이 생겨야할 텐데 라고 생각하며 ‘피의 성당’으로 향했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그 가족 일가와 함께 처형당한 장소에 세워진 ‘피의 성당’은 화려하나 웅장하고 근엄했다. 모든 방문객은 초록색의 천으로 앞을 가리고  머리엔 두건을 써야했다. 성훈이의 설명,

“1918년 볼쉐비키 혁명 후 니콜라이 2세의 황족은 일단 이곳으로 유배되어 생명을 부지했으나 황제를 지지하는 백군이 이곳으로 진격해 오자 7월 17일 밤 그들 모두를 처형했다고 합니다. 그 때 근처 조그만 오막살이에 살던 한 노파만이 이 처참한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 비극의 역사를 가리기 위해 스탈린은 이 자리에 혁명박물관을 세웠으나 소비에트 붕괴 후 혁명박물관은 사라지고 이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황제에 대한 국민들의 사랑이 대단하여 성금을 모아 무려 1천만 달러를 들여 이렇게 화려하게 지었다고 합니다.”

이 극적인 반전의 역사 현장에서 나는 머리가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