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 농업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농정담당자들이 시장의 역할은 불신하고 정부의 능력을 과신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이번 쌀 대책도 예외가 아니다. 정부는, 쌀 수요가 가격과 관계없이 시장 밖에서 결정되고 생산도 시장 밖에서 가격과 관계없이 정해지는 변수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데 생산이 수요보다 많으니 정부가 나서서 생산을 줄여야 하고, 그러니 논에 벼를 심지 않으면 보조금을 주어 벼 재배면적을 줄이고, 더 나아가 아예 정부가 논을 사들여 벼 이외 작물을 심도록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야 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정부나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정부는 다 같이 해악이 될 수 있다’는 경고를 상기하게 된다. 풍흉으로 인한 쌀의 일시적 과부족은 정부가 완화시킬 수 있지만, 구조적 수급불균형을 정부가 해결하려는 것이야말로 정부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 동안 농가가 벼를 심으면 쌀값이 떨어지더라도 가마당 17만 83원과의 차액 중 85%를 보전하여 주는 쌀소득보전직불제도를 도입하여, 결국 농가에게 벼를 심으라고 장려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생산이 너무 많이 되자 이번에는 벼를 심지 않으면 헥타르(ha)당 300만원의 보조금을 주는 생산조정제를 통해 쌀 생산을 줄이겠다고 한다. 정부가 벼 재배를 장려하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벼 생산을 줄이는 역할도 하겠다는 모순에 빠졌고, 그 결과 농가는 헷갈리고, 정면충돌하는 두 가지 정책에 재정이 투입될 뿐만 아니라 정부가 농지를 사들여 대지주가 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모순과 혼란 그리고 낭비가 발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예 소득보전직불제와 생산조정제를 모두 폐지하고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대안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 농가소득문제는 어찌하고 도대체 정부는 무슨 역할을 한다는 것인가? 여기서 미국 정부는 농업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고 지혜를 구해보자.

 미국 정부는 우리나라 쌀소득보전직불제와 유사한 제도를 중요작물에 도입하여 농가소득을 안정시키는 역할에 전체 농림성 예산의 무려 25% 내외를 쓴다. 농가소득안정이 미국정부의 매우 중요한 역할임이 명백하게 들어나는 대목이다. 미국도 이러한 제도의 도입초기에는 과잉생산을 유발하는 역기능으로 골치를 썩였으나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그런 역기능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진화시켜 정부의 농가소득안정 기능과 시장의 수급균형 역할이 상호 충돌하지 않도록 하였다.

 동시에 미국은 놀랍게도 전체 농업부 예산의 50%를 투입하여 2,590만명에게 식품구입권(food stamp)을 지급하고, 3,090만명의 아동에게 점심, 1,030만 명에게는 조식까지 급식하고 있다. 모든 국민의 식량안보를 보장하고 건강한 식생활을 지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미국정부의 역할이라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이를 통해 방대한 농산물 수요가 창출되는 부수적 효과를 거두고 있음은 감탄스럽다.

 한편, 인력투입 상황을 보면 자연자원과 환경을 보전하는 것이 단연 중요한 미국정부의 임무임을 알 수 있다. 깨끗한 수자원과 습지보전, 농경지와 산림 보호, 야생동식물 보호와 생물다양성 유지 등에 전체 농업부 인력의 44%가 투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원과 환경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발로 뛰며 지도하고 감시하여야 하므로 충분한 인력을 투입하는 것이다.

 미국의 예는 정부의 역할과 시장의 역할을 어떻게 재정리해야 할지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정권이 바뀌고 농정수장이 바뀔 때마다 농정개혁을 외치지만 농정개혁은 새로운 정책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맡길 것은 시장에 맡기고 정부가 꼭 해야 할 일을 찾아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