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 슈베르트의 가곡 <바위 위의 목동>을 소개한 내용 전해 드립니다. 슈베르트에 대해 아직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그를 생각하면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서일까요?
---------------------------------------
[ 가슴 깊이 품고 있는 고뇌로
나의 기쁨은 끝이 나고
세상의 모든 희망을 나로부터 떠났네
이곳에서 나는 참으로 외롭다
......
황홀한 힘이
내 마음을 하늘로 이끄네
봄이 왔다
봄, 나의 환희 이제 여행을 준비해야지]
이 독특한 곡(왜 독특하냐고요? 그전까지 독창곡은 대부분 피아노에 맞추어 노래하였습니다. 요즘도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고요. 그런데 이 곡은 피아노와 클라리넷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합니다. 그러니 참으로 귀하면서도 특이한 편성인 셈이지요)은 32세(우리 나이로 말이지요)에 세상을 뜬 슈베르트가 죽기 얼마 전 완성하였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이런 놀라운 곡을 쓴 것에는 연유가 있습니다. 이 곡이 탄생하기 3년 전인 1825년, 슈베르트가 깊이 신뢰한 성악가 요한 미하엘 포글의 제자인 소프라노 안나 밀더-아후프트만(Anna Milder-Hauptmann, 1785~1838)이 자신을 위한 곡을 부탁했습니다. 그 부탁을 잊지 않고 있던 슈베르트는 1828년 10월에 이 곡을 완성하고 11월 19일 세상을 뜹니다. 그러니 슈베르트는 이 곡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세상을 뜬 셈이지요. 가사는 사랑의 절망으로부터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젊은이의 심경을 표현한 듯한데, 노래 또한 뒤로 갈수록 환희의 빛을 띱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음악의 즐거움을 안겨 주었으면서도 자신은 고통과 아쉬움 속에 죽어간 슈베르트를 생각하면 이 곡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
2. 시인과 촌장, 가시나무
https://www.youtube.com/watch?v=9n8qDuXLbDw
6년전 메모에 '한 인간의 내면에는 전 인류의 정신이 살고 있다'고 적어 놓았네요. 더 확장하면, 한 인간의 내면에는 '우주 안 온 존재들의 특성이 다 살고 있다'가 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종종 파충류처럼도 행동하고 날파리처럼도 구는 걸 생각해 보면 그럴싸하다고 주장해 봅니다.^^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는 대학 시절 얼마간 만났던 여학생이 이별을 고할 때 건넨 카세트 테이프에 실려 있던 곡입니다. 그녀는 왜 하필 이 노래를 담은 테이프를 남겼을까 한참 생각해도 답을 알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2018. 2. 25.)
한 인간의 내면에는 전 인류의 정신이 살고 있다. 조화로운 삶을 위해서는 그 인류들을 조율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필요하다. 그 지휘자는 자기가 임명한다.
심리학 이론들을 죄다 의학적 실험을 통해 검증한 어느 의사의 e-book을 읽으며 아내가 해 주는 얘기들을 듣다가 든 생각. 노래도 그런 게 있지,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시인과 촌장. 모두가 다중이다. 그 정신들 중에 누가 지금의 나를 움직이고 있는 걸까. 느낌엔, 겁많은 소아와 새로운 것은 다 귀찮은 노인적인 정신? 청년, 중년, 장년 정신을 북돋우고, 소아와 노인은 소리를 줄여줘야 할 듯.
그러고 보니, 스스로를 '애늙은이'라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중년답게, 내면의 중년의 소리를 좀 들어 보자. 코드부터 꽂아줘야 할 지도. 중년의 덕목은 무엇일까. 절차탁마같은 근육 땡기는 얘기보다는, 청년의 이야기 들어 주고 작은 재주라도 나눠 주고 있는 것 베풀어주는 것?
자기의 완성만 보고 뛰어가지 말고 함께 걸어가는 것? 꿈에서 내 안의 인류들을 만나보고 싶구나. 자자.
---------------------------------------------
3. 인순이, 거위의 꿈
https://www.youtube.com/watch?v=suXnFAxMK78
인생의 덕목은 '쓰러지지 않는 것'에 있지 않고, 쓰러진다 해도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걸어갈 수 있는 것'에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바닥까지 가지 않는 게 아니라, 눈 딱 감고 바닥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라는 정호승 시인의 시도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
바닥에 대하여
정호승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