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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2.03.18
제목
[산골여행 2] 2월 11일,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 이정환 
첨부파일
 

* 이정환 이사장이 지난 겨울 다녀온 산골여행 두번째 글입니다. 

 

「산골여행 2」

2월 11일,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GS&J 이사장 이정환

 

 

 4시에 눈이 떴다. 좀 춥다. 어깨가 시리다. 어제 아침에도 좀 춥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불이 작아서 몸을 충분히 감싸지 못하는 탓일까? 역시 나이 탓일까? 아내가 챙겨준 전기 매트를 켜니 그 따스함이 정말 감동이다. 다시 잠이 들었다.

 

무슨 꿈이었나? 무언가에 쫓기다가 번득 눈을 떠 시간을 보니 아불싸 7시! 창이 훤하게 밝았다. 기온은 영하 13도. 정신없이 이옷 저옷 들쳐 입고 해돋이 전망대 쪽으로 뛰었다. 이미 동쪽 하늘은 제법 붉게 물들고 있다. 내일은 흐린다고 하고 모래는 떠나야 하니 지금 뛰어야 한다. 숨이 턱에 찼으나 뛰었다. 문득 고라니 세 마리가 왼쪽 눈 덮인 밭에서 우측 덤불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지난번에 왔을 때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것을 즐기며 천천히 멍에전망대 쪽으로 산책, 고라니 10여 마리가 하얀 설원 언덕 위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 깜짝. 엎디려 숨을 몰아쉬며 바라보던 기억이 스친다. 고라니는 뛰어오는 나를 보고 도망치고 있는 듯---. 미안하지만 걸음을 늦출 수는 없다. 꽤 가파른 언덕길, 드디어 더는 뛸 수 없어 붉은색으로 뒤덮인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다. 다행히 해가 솟아오르기 전에 전망대에 닿았다. 눈이 없으니 망정이지 지난번 왔을 때처럼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면 뛰기는커녕 어기적어기적, 전망대에 닿으면 해가 중천에 떴을지도 모른다. 눈이 없어서 실망했지만, 지금은 정말 다행이다!

 

'초원의 빛'은 사라지고

드디어 해가 능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다. 백두대간 연봉의 능선과 능선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그 위의 붉은 하늘, 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붉다. 붉은색이란 붉은색은 모두 다 나와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 같다. 천 가지 색이 될까? 감동이다. 이 절경을 보는 사람은 나 외에 아무도 없다. 두 팔을 뻗고 두 다리에 힘을 주어 깊게 심호홉을 한다. 백두대간의 새벽 맑은 공기와 붉은 하늘의 정기가 다 몸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며. 그러나 지난 세월에 대한 깊은 감사와 회한,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뒤범벅되어 나는 워즈워스의 시를 소리높여 외쳤다.

 

What though the radiance

which was once so bright

Be now forever taken from my sight,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s,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한때 그토록 눈부시던 광채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나니,

초원의 빛도 꽃의 영광도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지만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남아있는 것에서 도리어 힘을 찾으리니;

  

영화 은교와 유스(Youth)를 보면 늙음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욕망, 좌절과 슬픔, 그리고 절망. 가슴 아팠다. 그리고 두려웠다. 그러나 “눈부시던 초원의 빛, 꽃의 영광은 사라지고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지만 남아있는 것에서 힘을 얻으리라”는 워즈워스의 ‘초원의 빛’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동안거’의 화두가 되었다. 이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In the primal sympathy

Which having been must ever be;

In the smoothing thoughts that spring

Out of human suffering;

In the faith that looks through death,

In years that bring the philosophic mind.

 

쟁쟁한 영문학자들의 번역이 있지만 나에게 이 부분은 이렇게 들린다.

 

타고났고 앞으로도 언제까지 이어질 원초적 공감의 마음에서;

인간의 고통이 잉태하는 평정심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믿음에서,

그 세월 속에서 철인(현자)의 마음을 갖게 되리라.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내가 한 말과 일에 공감하고 긍정해 주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와 힘이 되었던가. 화려한 젊은 시절은 갔지만 내가 가지고 태어난 원초적 공감의 마음이 가족, 이웃과 어울려 살아가는 힘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아닐까?

많은 슬픔과 고통의 세월을 겪어 주름이 깊이 파였던 우리의 할머니들은 기쁜 일을 알리면 그저 조용히 미소 짓고 슬픈 일을 알리면 그저 쓸쓸한 표정으로 응답하셨다. 그 평정심! 사랑에 정신을 잃지도, 분노에 떨지도, 욕망에 들뜨지도 않는 평정심, 그것이 큰 힘이 되리라고 워즈워스는 말하고 있다고 느낀다. 어머니가 부처님 앞에 수십 번 엎디실 때 자식의 미래에 대한 근심과 함께 아마도 죽음을 바라보는 용기를 구하셨을 것이다. 그 믿음이 어머니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으리라. 나도 그렇게 세월이 흐르며 드디어 철인(현자)의 경지에 이르리라는 희망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뻗쳐오르던 긍지와 자부심은 풍화되고

1973년에 농업경제학 석사과정을 시작하여 연구 생활 50여 년이 되었다. 농촌경제연구원 25년, 그리고 GS&J를 설립한 것이 2005년이니 17년이 되었다. ‘연구를 통해 증거를 보여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고 더 좋은 선택을 하게 한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싱크탱크가 되어,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탠다.’ 그 꿈을 이루기에는 갈 길이 아직 멀다. 그러나 이제 70세를 훌쩍 넘어 80을 향해 가고 있다. 그동안 아낌없이 쏟아붓고 달려왔다. 아쉬운 것, 미진했던 것을 세자면 한둘이 아니지만, 항상 선두에 있고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을 찾아내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 그것이 나를 달리게 하는 에너지가 되었다. 사람들이 GS&J의 연구 결과에 주목하고 흔쾌히 도와주어, 앞서가는 싱크탱크로 평가받으며 너무나 행복했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고, 변하고 있다. 내가 선두를 유지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고 느낀다. 긍지와 자부심은 풍화되어가고 있다. ‘이제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읊조리며 온 길을 반도 되돌아오기 전에 해는 솟아오르고 언덕배기 넓은 눈밭, 황토밭은 겨울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산 아래 마을과 들판에도 겨울 햇살이지만 그 따스한 온기가 가득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내 마음에도 온기가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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