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판) 1. 21세기에 왜 농업인가?(2)  

1-2 농업의 역할 확장

에너지를 넘어 영양, 안전, 맛 

농업은 태양에너지를 농축하여 인간에게 전달하는 일이 본질적 역할이지만 사람의 요구가 확장된다. 농업은 단순히 에너지를 전달하는 기능을 뛰어넘어 늘어나는 요구를 충족하여야 한다.

사람이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에너지뿐만 아니라 무기질과 비타민 등 여러 가지 영양소가 필요하고 그 대부분은 식품을 통해서만 공급받을 수 있다. 또한 농산물 생산과정에서 생화학적으로 오염되지 않아야 생명과 건강을 유지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농업은 필수 영양소를 풍부하게 함유하고 생화학적으로 오염되지 않은 농산물을 생산 공급해야 한다.

농산물이 그런 필요를 충족하면 사람들은 맛이 있기를 요구한다. 여기서 맛은 음식물을 먹을 때 느끼는 감각을 통합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혀로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후각이나 촉각이 느끼는 냄새나 질감, 모양이나 색깔이 주는 시각적 느낌까지도 포함한다. 맛은 식물이 뿌리 내리고 있는 땅의 물리 화학적 특성, 자라면서 받은 태양 빛, 물, 바람, 습도, 병충해 등 모든 환경 요소에 따라 결정되는 식물체의 종합적 특성이다. 그러나 맛에 대한 느낌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현재의 우리 몸은 이제까지 섭취한 음식물의 축적이므로 그 축적이 특정한 음식물에 대한 느낌을 결정한다. 어느 나라나 자국산 농산물에 대한 선호도가 높고 누구나 어려서부터 먹고 자라난 농산물과 음식에 대한 욕구와 집착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식성은 그 지역의 기후와 풍토, 생산 기술이라는 공급 조건과 어우러진 오랜 식습관으로 우리 몸에 체화된 문화현상이다. 농업은 소비자의 그런 욕구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런 욕구에 맞는 농산물임을 보장하기 위해 농산물 지리적 표시제가 운용된다. 특정 지역의 명칭이나 그에 준하는 표시는 그 국가, 그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그 가공품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농산물은 생산된 풍토와 기후에 따라 특성이 다르고, 소비자가 그 특성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최근의 소비자 의식조사 결과 70% 내외가 쌀과 채소 등 국내산 농산물에 대해 17∼20%를 더 지불할 의사가 있고, 그 이유는 국내산 농산물이 안전하고(42.2%) 신선하다고(21.6%) 믿기 때문이라고 응답하였다. (GS&J, 「농업 농어촌 정책 국민의식 조사」, 농특위, 2023). 실제로 같은 쇠고기이지만 호주산 냉동 등심은 500그램에 6천 원 정도인데 한우 등심은 3만 5천 원이다. 호주산 쇠고기로 대체될 수 없는 소비자들의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우고기 생산량이 반으로 줄어든다면 쇠고기 수입이 자유화되어 있더라도 한우고기 가격은 폭등하여 정말 서민들은 맛을 보기 어렵게 될지 모른다. 국민의 삶의 질은 떨어진다. 한국농업이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호주 사람들은 그들이 먹고 자란 호주산 쇠고기를 더 좋아하고, 그 쇠고기가 그들의 삶의 질을 높여준다.

문화적 요구  

소비자 선택에는 먹거리의 유형적(tangible) 특성뿐만 아니라 그 먹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특성이 영향을 미친다. 특정한 산지의 농산물, 특정한 농법의 농산물을 원한다. 그런 소비자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표시를 엄격히 규제하는 원산지 표시제가 운용되고, 이에 대한 국제적 규범까지 있다. 예를 들면, 밀양 얼음골 사과는 맛을 넘어 얼음골이라는 특수한 곳에서 재배되었다는 스토리가 주는 신비감이 수요의 한 축이다.

그곳에서 재배된 사과이어야만 “밀양 얼음골 사과”라고 표기할 수 있게 하여 그곳 사과이기를 원하는 소비자 요구를 보장한다. 마찬가지로 유기농법으로 생산된 것이기를 원하는 소비자를 위해 유기농 표시제를 엄격히 운용한다.

 윤리적 요구도 있다. 노동 착취, 특히 어린아이들의 강제노동으로 생산된 농산물을 거부한다. 탄소배출이 적은 방식으로 생산된 농산물을 요구한다. 동물 사육과정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축사와 운동장을 제공하고, 학대적 행위를 하지 않기를 요구하는 경향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소비자는 이러한 요구를 충족하는 농산물을 요구하고, 그런 요구를 보장하기 위한 표시제도가 운용된다. 소득 수준이 높아질수록 문화적 윤리적 특성에 관한 요구가 강해진다.

농업이 국민의 삶의 질을 결정  

미국에서 농업은 GDP 비중이 1%도 되지 않는 산업이지만 연간 120조 원에 이르는 예산을 농업에 투입한다. 그해의 농산물가격 수준에 따라 다르지만 그중 30조 원을 가격지지와 보전에 쓴다. EU도 농업의 GDP 비중은 아주 작지만, 공동예산의 50% 이상을 농업정책에 쏟아붓는다. 그중 70%는 농가소득 보전을 위해 쓴다.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일관되게 이러한 지원을 지속하여 왔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 UR과 DDA 협상의 결렬을 무릅쓰고 10년여 이상을 버티면서 안간힘을 썼다. 도대체 농업이 무엇이기에 그들은 농업을 부둥켜안고 일관되고 단호하게 농가 지원에 이처럼 매달려 왔는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농업은 에너지 공급은 물론 영양, 안전성, 맛에 대한 요구를 충족해야 하고, 문화적 특성과 윤리적 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다. 먹거리에 대한 소비자의 이러한 요구를 얼마나 충족하는가에 따라 국민의 삶의 질이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농업의 GDP 비중이 1% 남짓밖에 안 되는 선진국들이 농업을 부둥켜안고 일관되고 단호하게 농가 지원에 매달려 온 첫번째 이유이다. 농업은 태양에너지를 농축하여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거의 유일한 산업이고, 자국산 농산물에 대한 소비자의 집착이 있어 농업이 국민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가 된다. 소비자의 이런 필요와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바로 식량안보(food security)다.

농업과 농정은 식량안보(food security)가 우선 목표

식량은 곡물을 의미하고 식량안보는 곡물을 자급해야 달성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그러나 이미 30여년 전에 세계식량정상회의는(World Food Summit, 1996) 식량안보를 모든 사람이 항상 각자의 식습관과 기호에 맞는 안전하고 영양가 있는 충분한 먹거리(food)를 물리적으로 경제적으로 조달하여 건강하고 활발한 삶을 이루는 상태라고 규정하였다.  

＊ when all people, at all times, have physical and economic access to sufficient

safe and nutritious food that meets their dietary needs and food preferences for an

active and healthy life.(World Food Summit, 1996).  

요컨대 곡물을 넘어 각 소비자의 식습관과 기호에 따른 다양한 먹거리를 항상 적정한 가격에 조달할 수 있는 상태를 보장하는 것, 다시 말하면 각자가 밥상을 지키는 것이 식량안보(food security)이다. 밥상은 생존조건이자 가장 강렬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최근의 소비자 의식조사 결과 소비자의 61.4%가 현재와 같은 식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되지 않을까 불안하다고 응답하여 먹거리 안보가 소비자에게 절실한 현안 과제임이 확인되었다. 선진국들을 보자.

EU 농정 목표

EU는 출범 당시부터 먹거리 안보(food security)를 가장 중요한 농정목표로 설정하였다. 2013년과 2021년 개혁안에서도‘먹거리 안보를 달성할 수 있는 농업’을 역시 첫 번째 목적으로 제시하고, 적정한 농가소득 보장과 경쟁력 향상을 이를 달성하기 위한 필요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 EU 설립을 위한 로마조약 39.2조에서 조약의 목표를 ‘to increase productivity

through technical progress and the best use of the factors of production (such as

labour); to ensure a fair standard of living for communities employed in agriculture;

to stabilize markets; to secure the availability of supplies; and to enforce fair prices.’ 라고 규정하였다. 

 ＊ 2013년 공동농업정책 선언문에서는 ‘Europe’s capacity to deliver food security

is an important long term choice of Europe. The main objective of CAP is, for viable

food production, to contribute to farm income and limit farm income variability,

recalling price and income volatility and natural risk.‘ 라고 명시하였다.

스위스 농정의 우선 목표

국민의 삶의 질이 가장 높은 나라의 하나로 인정받는 스위스는 헌법에 '시장 수요에 상응하는 지속가능한 생산을 통해 식량 공급을 보장하는 농업‘이 목표라고 선언하였다. 뒤이어 자연 자원을 유지하고 농촌에 사람이 고루 살도록 하는데 기여하는 농업이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 스위스 헌법은 ’The Confederation shall ensure that agriculture makes a major

contribution through sustainable production geared to market demands to: a. ensuring

food supplies for the population; (b. maintaining the natural resources and preserving the countryside; c. maintaining a decentralised settlement pattern in rural areas.')라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 농정은?

세계 최대 농업 생산국인 미국도 모든 미국인의 건강과 영양, 삶의 질을 지키는 농업을 농업부의 목표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농업정책의 구체적 내용을 담고 있는 농업법(farm bill)에서는 모든 미국인의 건강한 삶을 보장하는 식량안보 달성이 미국의 오랜 목표이며 이를 더욱 튼튼히 하려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 미국은 농무성은 농업정책의 비전을 ’An equitable and climate-smart food and

agriculture economy that protects and improves the health, nutrition, and quality of

life of all Americans; yields healthy land, forests, and clean water; helps rural America thrive; and feeds the world.‘ 라고 선언하고 있다.  

＊ 미국 2018년 농업법(farm bill)은 ’Building on and complementing our long-

standing efforts to address food security, we are expanding our efforts to advance

food and nutrition security. Nutrition security means all Americans have consistent and equitable access to healthy, safe, affordable foods essential to optimal health and well-being.‘

농촌의 가치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지만 ‘시간을 파는 산업’이 첨단산업 못지않게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이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시간을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게 보낼 수 있는가가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북유럽의 공연문화는 긴긴 겨울밤 시간을 보내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한 것이고, 라틴의 축제문화는 화창한 한낮의 시간을 즐겁게 보내려는 필요와 노력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요컨대 시간을 즐겁고 보람 있게 보내려는 필요가 다양한 문화를 창조해 낸 것이다.

그러나 쾌적한 자연을 찾아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에 대한 욕망은 다른 문화나 여가 활동을 뛰어넘는다. 그래서 산과 바다, 그리고 농촌이다. 앞 절에서 농업의 본질은 태양에너지를 농축하는 활동이므로 태양에너지를 흡수할 넓은 공간이 필요하고, 그 공간이 농촌이라고 하였다. 농촌에서는 각 지역의 자연과 농업이 어우러져 독특한 농업 경관을 조성하고, 그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지역 특유의 먹거리 문화를 연출한다. 그렇게 농촌 공간은 국민 삶의 질을 높이는 다양한 문화상품이 창출되는 공간이고, 그 본질은 농업이다.

4차 혁명시대에도 여전히

우리나라 농업의 부가가치 생산액(GDP)은 30조 원 정도로 금속산업 규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중앙정부 농업예산만 20조 원에 이르고 정부, 지자체, 공기업 등에 수만 명의 인력이 농정업무에 매달려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농업과 농정을 논하려 한다. 이 모든 것은 농업이 태양에너지를 농축하여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데 필수적인,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산업이고, 자국산 농산물과 농촌 공간에 대한 소비자의 집착이 있어 농업이 국민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AI가 인간 두뇌를 대체하는 21세기에도 지구 곳곳의 들판에서 농작물이 낮에는 치열하게 태양에너지를 농축하고 밤에는 잎과 줄기를 키우는 삶을 펼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먹고 에너지를 얻어 생명을 유지하며 즐거워할 것이다. 그 햇빛 쏟아지는 들판에는 땀 흘리는 농부가 있고, 그 공간, 그 농촌을 더 많은 사람이 열심히 찾아갈 것이다. 우리 생활이 더욱 풍요해지고 여가가 더 많아질수록 차별화된 먹거리와 농촌 공간에 대한 욕구는 더욱 간절해지고 그 가치는 더욱더 높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