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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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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야기(4), 명ㆍ일의 군제와 병참체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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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이야기(4), 명ㆍ일의 군제와 병참체계(1)  

   

 

오호성 (성균관대 명예교수)

 

 

 

 1. 명의 군제와 병참체계

 

1) 명의 통치체제와 군제

 

 (1) 중앙관제

 

명나라의 통치구조는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되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황제는 중앙과 지방의 행정기구와 군사조직을 한 손에 틀어쥐고 나라를 다스렸다. 명나라의 중앙 정부의 핵심기관은 황제의 비서기관인 내각, 최고의 행정기구인 6部와 감찰과 사법을 통괄하는 도찰원(都察院), 군사를 담당하는 5군도독부(5軍都督府)라고 할 수 있다. 3대 황제 영락제가 등극하고부터는 황제의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황제는 행정ㆍ사법ㆍ군사ㆍ감찰 기구까지 한 손에 쥐고 별도의 친위부대 인 금의위(錦衣衛)와 비밀경찰이라고 볼 수 있는 동창(東廠)까지 운영하였다.

 

 (2) 지방관제

 

명나라는 황제가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원나라 때까지 운영되어오던 지방행정 기구인 중서성(中書省)과 행성(行省)을 폐지하였다. 그 대신 각 성(省)에 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使司, 布政司),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 按察司),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都司)라는 세 개의 독립된 기관을 설치하였다.

 

포정사는 해당 성의 민정과 재정을 담당하고, 안찰사는 형옥과 감찰을, 도사는 군사 문제를 전담하였다. 포정사 아래에는 府(부)ㆍ주(州)ㆍ현(縣)이라는 지방관청을 두었다. 명나라 지방관제의 특징은 한 성이 한 사람의 지방장관에 의해 통치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행정ㆍ사법ㆍ군사의 세 기구가 서로 독자성을 가지고 운영한다는 점에 있다. 이 지방 관청들은 황제의 직속 기관으로 황제의 통제를 받았다.

 

2) 명의 군사제도

 

 (1) 중앙 군사제도

 

나라의 중앙 군사기구에는 병부(兵部)와 5군도독부(5軍都督府)가 있었다. 병부는 문관이 장악한 군정기관이었다. 병부에는 장관 격인 병부상서(兵部尙書)와 차관급으로 좌ㆍ우 시랑(侍郞)을 두었다. 병부는 군호(軍戶)와 병적, 군수물자의 수송, 황실 호위, 무기 체계와 군사 전략의 연구 등을 맡았다. 병부는 또 황제의 명령에 따라 병력의 이동과 출전을 지시하는 권한을 가졌다.

 

중앙에 설치된 5군도독부는 황제가 거느리는 최고의 군령(軍令)기관으로 수도에 설치된 전ㆍ후ㆍ좌ㆍ우ㆍ중의 다섯 개의 도독부를 말한다. 5군도독부는 가장 서열이 높은 무관들을 사령관으로 임용하였으나 군사를 직접 거느리는 부대가 아니고 군사위원회의 기능을 가진 기구였다. 각 도독부는 3~4개 정도의 성을 관할하면서 관내의 도지휘사사(都司)를 절제하였다.

 

 5군도독부는 예하 도지휘사사 병력의 통솔과 작전을 감독할 수는 있었으나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오직 황제만이 병력의 이동과 출전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병부는 황제의 명에 따라 출병을 지시하는 권한을 가졌다.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황제는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 할 장수를 선임하여 인신(印信)을 주어 현지로 파견하였다. 황제의 명을 받은 장수는 인근 위소(衛所)의 병력을 차출하여 전쟁에 임하였다.

 

 (2) 지방 군사제도

 

도지휘사사

 

명나라는 각 성에 있는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都司)로 하여금 성 전체의 군사문제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명나라에는 총 16개의 도지휘사사가 있었다. 13개 성에 1개씩 그리고 변경의 소수 민족 지구인 요동(遼東, 만주지방), 대녕(大寧, 내몽고지역), 만전(萬全, 하북 宣化지방)에도 도지휘사사를 설치하였다.

 

위소(衛所)

 

도지휘사사는 일선 군부대인 위소를 거느렸다. 위소란 중요 군사 거점에 주둔하고 있는 위(衛)와 소(所)라는 일선 군부대를 말한다. 위소는 명나라 군사조직의 가장 핵심적인 단위였다. 1개 위는 보통 보통 5천 6백 56명의 장병으로 편제되었다.

 

1개의 위에는 전ㆍ후ㆍ좌ㆍ우ㆍ중의 5개의 천호소가 있고 1개 천호소의 병력은 1천 200명이었다. 1개의 천호소는 10개의 백호소로 구성되며 1개의 백호소 병력은 112명이다. 백호소 아래는 2개의 총기(總旗)기가 있으며 총기는 50명의 군사로 구성되었다. 총기 아래의 부대는 소기(小旗)인데 10개의 소기가 있고 1개의 소기에는 10명의 병사를 배치하였다. 소기는 명군의 편제 가운데 가장 말단의 부대였다. 1개 위의 지휘관은 총병(指揮使) 1명, 천호 5명을 비롯하여 650명의 장교와 일반 군사 5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를 지휘하는 사령관인 지휘사는 정3품의 품계를 가졌는데 오늘날의 사단장 격이라고 볼 수 있다.

 

3) 명군의 지휘체계

 

 (1) 전시 지휘체계

 

평상시 성(省)에서의 군사 지휘권은 도지휘사(都司)가 장악하였다. 영락제 이후 명나라는 21개의 도지휘사와 약 490개의 위소, 2개의 유수사(留守司, 直隸市의 위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약 200~300만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방대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다. 명은 전쟁 또는 대규모의 내란 등이 발생하면 황제는 장수 가운데서 총병관(總兵官)을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전시 지휘부를 만들게 하였다. 총병관은 황제로부터 인수(印綬)와 지휘도를 수여 받고 여러 위소의 병력을 출동시켜 전장에 배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다. 총병은 파병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부총병(副總兵), 참장(參將), 유격장군(遊擊將軍), 수비(守備), 파총(把摠) 등의 직책을 두어 무관을 뽑았다. 전쟁이 끝나면 총병은 인수를 반납하고 전투 조직은 해산하였다. 동원 부대는 원대로 복귀시켰다.

 

 (2) 경략ㆍ총독ㆍ순무

 

명나라 중기 이후부터는 큰 전쟁이 자주 일어나면서 동원 병력의 규모가 커지고 전쟁이 장기화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현지 주둔이 길어지게 되면서 여러 가지 행정적 군사적 지원 업무가 늘어났다. 3사(포정사ㆍ안찰사ㆍ도사)는 독립적이라 유사시에는 행정 지원 등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황제는 분쟁 지역이 넓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는 3사 위에 임시로 경략(經略)이나 총독(總督)또는 순무(巡撫)등을 임명하였다. 경략은 파견 부대의 편성과 군수의 조달, 부대의 배치, 작전 목표의 설정과 변경, 관할 지역에서의 행정 지원 등 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일을 관장하여 그 권한이 막중하였다. 경략은 전시 지휘체계로 문관이 무관을 영도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경략은 무관인 총병관(總兵官)을 지휘하였지만 직접 군사 작전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협의의 군사 문제는 총병의 전관 사항이었다. 경략은 임시직으로 전쟁 등이 끝나면 폐지하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의 총사령관 송응창(宋應昌)의 관직명은 흠차경략요계보정산동등처방해오왜군무병부시랑(欽差經略遼薊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兵部侍郞)이었고 무장 이여송(李如松)의 관직명은 방해어왜계요보정산동군무제독(防海御倭薊遼保定山東軍務提督)이었다.

 

4) 명군의 병참제도

 

 (1) 군호제軍戶制와 모병제募兵制

 

명나라는 국초부터 직업군인 제도를 택하여 평상시에는 훈련을 받고 유사시에는 전쟁에 동원되는 상비군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명나라 군사는 모두 직업군인으로 정부로부터 가족의 생활을 돌볼 수 있는 정도의 급여를 받았다. 명은 건국 직후부터 방대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이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군호제(軍戶制)와 둔전제(屯田制)를 결합하여 이용하였다.

 

군호(軍戶)는 처음부터 군사를 내도록 결정되어 있는 호구를 말한다. 군호는 호당 1명의 군사를 내어 군역을 담당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정군(正軍)이라 하였다. 징발된 군사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위소로 보내 군역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정군을 내지 않은 군호는 몇 호가 함께 여정(餘丁)을 한 명씩 징발하여 정군과 함께 위소에 파견하였다. 위소에 근무하는 정군은 전투를 담당하는 기군(旗軍)과 둔전을 경작하는 둔군(屯軍)으로 구성되었다. 위소의 둔전은 소속 부대의 비용과 병사의 군량을 충분히 자급할 수 있을 만큼의 토지를 배정받았다.

 

명나라는 군사를 위소에 파견할 때 반드시 처자를 동반하도록 하였다. 이는 직업 군인이 원격지에서 근무할 때 가족과 함께 있게 함으로써 군역에 전념하도록 하는 한편 가족들을 담보로 쉽게 도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임지에서 생활하였는데 일반적으로 강남의 군호는 강북으로. 강북의 군호는 강남으로 보냈다.

 

 (2) 銀경제와 모병제

 

명나라의 군호제와 둔전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점을 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위소에 나가있는 지휘관들이 지급한 토지를 사유화하고, 병사의 수를 과대 보고하고 식량을 빼돌리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토목보(土木堡)의 변(變)(1449) 이후 명나라의 방위체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만리장성을 수축하여 변진(邊鎭)을 만들고 대 병력을 배치하였다. 이에 따라 보급체계의 재편이 있었고 병력이 부족하자 정부는 모병제(募兵制)를 통하여 필요한 수의 군사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각지에서 많은 수의 지원병을 뽑아 일선의 위와 변진에 배치하였다. 군호를 통하여 충원된 병사와 모병제(召募制)를 통하여 뽑힌 군사가 동시에 일선부대에 배치되었다.

 

변방체계의 재편과 병력의 대폭 이동은 배치지와 급여 지급지의 분리를 가져와 오는 결과를 나았다. 둔전이 와해되었으므로 정부는 민간의 식량을 구입하여 군사들에게 공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결과 변경에 있는 수많은 위소와 변진에 군량을 공급하기 위한 수송인력과 병참선이 늘어나게 되었다. 정부가 민간의 식량을 구입하여 운하를 통해 운반하고 전국의 변경과 각 주둔지로 배송하는 비용이 크게 증가하였다.

 

 (3) 은본위 경제와 군수물자의 시장구매

 

명군은 군량을 배급소에서 인수하여 소속 부대로 가져가는 사이에 많은 부정이 일어났다. 정부는 부정을 막기 위하여 점차 현물 대신 銀을 지급하기 시작하였다. 은 지급 비중이 점차 늘어나 1538년(嘉靖 17)부터 북변에 주둔하는 부대는 전부 은으로 비용을 지급하고 필요한 물자도 은으로 조달하게 되었다.

 

결국 명나라는 모든 세금을 은으로 받고 지출도 은으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명나라의 군수시스템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0년 전인 1551년(가정 30)부터 군사들의 급여를 비롯 모든 부대 운영비를 은으로 지급하고 가까운 시장에서 군량과 군수물자를 매입하도록 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2) 명군의 급여체계

 

 (1) 급여의 종류

 

명은 직업적인 상비군제도를 채택하였으므로 군인과 그 가족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일정 액의 급여를 주었다. 급여의 종류는 월량(月糧)과 행량(行糧) 그리고 구량(口糧)과 사여(賜與)로 구성되었다. 월량은 본인과 가족들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매월 주는 월급이다 행량은 군사들이 출전할 때 또는 먼 곳으로 훈련이나 경비 등 특수임무를 위해 출동할 때 지급되는 수당을 말한다. 행량은 출정기간 동안에 일당을 계산하여 주었다. 구량은 훈련이나 특수임무를 위해 출동할 때 동원 일수와 파견 거리가 짧을 때 주는 수당을 말하는데 행량과 같은 성격을 지녔다. 사여는 특별한 공로가 있을 때 주는 것으로 액수가 정해지지 않은 상을 뜻했으나 나중에는 보너스처럼 되어 급여의 한 부분이 되었다. 명나라 예산의 대종은 군사비였고 군사비의 대부분은 군의 급여가 차지하였다.

 

 (2) 군사에 대한 급여

 

월량ㆍ행량ㆍ구량은 조건이 만족되면 중복 지급되었다. 예를 들면 군사가 전쟁터에 나가면 본인은 행선지에서 행량과 구량을 받고 가족들은 원(原) 위(衛)가 있는 곳에서 월량을 받았다. 가족이 없는 소모병인 경우에는 그 가족이 살고 있는 곳으로 안가은(安家銀)이란 이름의 월량을 보내주거나 본인에게 직접 주었다.

 

3) 조선 파견군에 대한 병참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에 파병되는 명군의 총 지휘권을 수임 받은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도 중앙정부에서 배정한 은화를 가지고 민간의 업자들과 장인들에게 필요한 무기와 장비를 주문하고 구입하였다. 군수품은 조선 파견군의 총 책임자인 경략이 조달하여야 할 품목과 소요량을 판단하여 호부(戶部)를 통하여 황제에게 신청하면 호부에서 예산이 내려온다. 경략은 정부로부터 예산을 받아 필요한 무기를 기술자들에게 발주하거나 상인들로부터 구입하였다. 당시 명나라의 여러 지방에는 무기를 제조하여 판매하는 무기상 들이 있었다.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군사들은 급여 지급규정에 따라 월량과 행량 및 마량(馬糧)등을 모두 받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銀이 통용되지 않자 명나라는 명군이 먹을 군량을 명나라에서 구입하여 조선으로 수송하였고 조선의 관리들은 이것을 인수하여 명군이 주둔한 지역까지 수송하여 분배하는 책임을 맡았다. 명나라는 산해관에서 압록강에 이를 때까지는 현물과 현금 가운데 군사들이 원하는 대로 주었다. 그러나 일단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와서는 모두 현물로 지급하였다.

 

명군은 압록강을 건너오기 전까지 군사 1인당 행량으로 매일 쌀 1되 5홉씩을 지급하였다. 군사들 가운데 돈으로 받기를 원하는 자에 게는 은 2전을 주고 소금과 채소값으로 은 3전을 주었다. 말은 한 마리당 매일 사료로 콩 3되와 마초 1다발(중량 15근)을 지급하는데 돈으로 받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은 2전씩을 주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명나라 군사에게 지급한 1인당 1일 소요 군량 1승(升) 5홉(合)은 명군의 행량 규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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