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17 문화일보에 실린 GSnJ 연구위원 김한호 서울대 교수의 글입니다.

쌀 개방, 촘촘한 農家대책 함께 가야

GSnJ 연구위원 김한호(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

  자국의 쌀을 지키려는 필리핀 정부의 노력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필리핀은 159개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 가운데 한국과 함께 장기간 쌀 관세화(關稅化) 유예를 유지해 온 나라이기 때문이다. 필리핀에서 쌀은 우리나라 이상으로 중요한 작물이다. 전체 노동력의 3분의 1이 쌀 생산에 종사한다. 그리고 소득 최하위 30%에 해당하는 가계는 소비의 4분의 1을 쌀 구입에 지출한다. 쌀 공급 안정은 사회 안정과 직결된다.

 이 같은 생산과 소비 측면에서의 중요성 때문에 필리핀 농업 정책의 지속적인 목표는 현재 약 90% 수준에 이르는 쌀 자급률을 100%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수년 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태국, 베트남 같은 이웃 쌀 경쟁국에 비해 경쟁력이 약하다. 생산 비용을 보면 베트남의 200%, 태국의 130%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필리핀은 관세화로 가게 될 경우 자국의 쌀 산업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어떻게든 관세화 유예를 다시 확보해 수입물량 제한 정책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두 번째로 얻은 관세화 유예가 종료되기 1년 전인 2011년 11월, 세 번째 관세화 유예를 시도했다. 하지만 WTO 농업협정에 의한 관세화 추가 유예는 이미 한 번 사용했다는 이유로 회원국들의 반대에 부닥쳐 실패했다. 이때 고육책으로 선택한 방안이 WTO 설립 협정에 근거한 향후 5년 간 쌀 관세화 의무면제(웨이버)다. 그리고 웨이버를 활용하는 5년 내에 쌀 자급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운 것이다.

 마침내 2012년 3월 의무수입물량을 현재보다 2.3배 증가, 쌀 이외 품목의 관세 인하 등 상당한 대가를 약속하면서 웨이버 부여를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은 필리핀이 제시한 대가에 만족하지 않고 그보다 훨씬 더 큰 쌀 외에 다른 추가적 양보를 요구했다. 필리핀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게 되자 이들은 합의를 거부했고, 그에 따라 지난 9일 WTO 상품무역이사회는 필리핀의 웨이버 요청을 사실상 기각해 버렸다. 따라서 웨이버 부여의 최종 결정권을 가진 WTO 각료회의에 상정도 하지 못하는 결과를 맞은 것이다.

 쌀 관세화에 대한 필리핀이라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은 우선, 추가 유예를 이미 한 번 사용한 한국 역시 WTO 농업협정에 의한 관세화 유예의 재확보는 전혀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협상을 통해 지금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이른바 현상 유지 방안 역시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그것이 가능성 있는 대안이었다면 이토록 절박한 필리핀이 고려하지 않았을 리가 없을 것이다. WTO 농업협정에 근거한 관세화 유예의 재확보를 거부당하자 필리핀은 즉각 WTO 설립 협정에 근거한 웨이버를 찾은 것이다. 그런데 주요 선진국들의 반대로 이마저도 실패한 것이다.

 저소득 개발도상국에 대한 선진국들의 인정사정없는 냉정함을 볼 때 필리핀에 비해 훨씬 고소득국인 대한민국의 경우 웨이버 획득 또한 거의 불가능한 방안으로 봐야 할 것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게 하려면 우리가 엄청난 추가 양보를 해야 한다는 건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회원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필리핀에 비해 한국은 쌀 외에 다른 분야에서 얻어낼 것이 엄청나게 많다고 볼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유일한 방안은 관세화로 전환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은 쌀 산업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함께 관세화 협상을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하고 지혜를 모으는 일이다. 그리고 정부는 국내 쌀 농가(農家)를 안심시키고 쌀 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구체적 정책을 제시함으로써 관세화를 우려하는 측의 불안을 제거해 줘야 한다. 타산지석은 복잡한 미로에서 쉽게 나가는 길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