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J 이사 김한호(서울대 교수)

쌀은 자연·인문 환경을 좇아 역사가 우리에게 준 주곡이다. 이맘때 들판이 뿜는 벼의 황금빛은 우리 정서의 뿌리다. 오랜 세월 쌀 풍년은 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축복이었다. 그런데 지금 쌀 풍요가 오히려 국가의 부담이 된다. 초과 생산이라는 풍요 때문에 쌀 가격이 작년 이맘때보다 30% 가까이 떨어졌다. 이것이 마땅히 울려야 할 가을 풍요의 축가를 밀어낸다.

팬데믹,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국‒중국 분쟁 등으로 농산물과 원자재 중심의 국제 공급망이 경색돼 세계는 지금 인플레이션 덫에 걸렸다. 식량만 하더라도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세계식량가격지수가 올봄 159.7까지 치솟으면서 종래 최고치인 2011년의 131.9를 27.8포인트나 웃돌아 세계적으로 식량 안보 우려가 제기된다.

이때 한국 쌀값은 폭락한다. 한국 쌀값은 급락하고 국제 식량 가격은 급등하더라도 한국 쌀값은 여전히 국제 쌀값보다 훨씬 높다. 국내 쌀 시장은 높은 관세로 보호받기 때문이다. 보호하는 큰 이유는 쌀이 한국적 환경에 적응해 온 한국 농업의 대표 품목으로 농가 소득의 최대 원천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역사적으로 국민의 주곡이 돼 식량 안보 차원에서 정책적 목표 품목이 됐기 때문이다.

시대와 더불어 소비자 선호는 급격히 변했다. 30년 전 1991년에 116.3kg이던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지난해에는 56.9kg이 돼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생산은 538만 톤에서 388만 톤으로 불과 28% 정도 줄었다. 인구는 감소하고 식품 선택 폭은 넓어지며 배달과 외식이 확산될 소비 환경 속에서 생산 환경이 변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 기조는 유지될 것이다.

쌀을 멀리할 소비 환경은 분명한데 생산 환경이 그것을 좇아 변할 가능성이 낮아 보여 우려가 된다. 우선 쌀은 농업 노동력 초고령화라는 현재 여건에서 고령 농업인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품목이 됐다. 정부가 수립돼 공공 정책을 펼쳐 온 이래 주곡인 쌀의 자급 달성은 불변의 목표였고 정부는 쌀 중심 기술 개발에 집중했다. 쌀은 이제 거의 100% 기계 경작이 가능하다. 정부의 농업 노동 요구량 추정치를 보면 1,000m² 경영에 많은 주요 품목이 수백 시간의 노동 투입을 요구하지만, 쌀은 10시간 미만이다. 현재 경영 의사 결정권자라고 할 수 있는 농가 경영주 평균 연령이 67세에 이른다. 이런 고령 노동과 생산 기술 구조에서 쌀은 대체 불가 품목이 됐다.

더 큰 우려는 쌀이 점점 ‘정치재’(政治財)가 되고 있다는 데 있다. 여의도 정치권은 지금 초과 공급인 쌀에 대해 정부 의무 매입을 규정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놓고 소란하다. 국회 다수당인 야당이 법 개정으로 쌀값 안정 장치를 제도화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국책연구기관은 야당의 안대로 제도가 도입되면 수년 후에 정부 매입 규모는 연평균 60만 톤을 넘고 매년 필요 예산은 1조 원을 훌쩍 초과할 것으로 전망한다. 지속적 정부 매입은 증산을 부추겨 해마다 가을이 되면 쌀은 축가보다는 비가의 주제가 될 것 같다.

지금 겪는 쌀 문제는 주어진 인적· 물적 환경에서 국민 식량 해결이라는 주곡으로서의 역할 수행을 위해 국민적 합의로 연구 개발, 보호 정책 등을 선택해 온 결과다. 하루아침이 아니고 긴 시간을 거치며 형성된 문제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문제는 시간을 두고 해결하려는 인내를 보이든가 시간을 단축하려면 걸맞은 대투입(big push)을 해야 할 것이다. 대투입의 예로 쌀의 대체용도 발굴에 연구 개발을 강화하는 것과 쌀 생산을 전환할 수 있는 대규모 수입 대체 작목 단지를 조성하는 것 등이 있다. 세계적으로 식량 안보를 강조하는 이때, 어떤 경우에도 쌀 자급은 지켜져야 한다. 무엇보다 정치권은 쌀을 단순히 표를 모으는 ‘정치재’가 아닌 튼튼한 경쟁력을 갖춘 ‘시장재’로서 국민의 주곡 기반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쌀이 다시 가을 축복의 전령사가 되기를 바란다.

[출처: 대학신문] 원문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