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nJ 이사장 이 정 환

13. 아, 모든 오비디오 장비는 쓸모없어지고 
   

  6월 1일 아침, 자명종 소리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넓은 초원이 아니라 자작나무가 빼곡히 늘어선 숲이 펼쳐져 있었다. 시베리아는 여러 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바로프스크를 중심으로 하는 동부는 평탄한 초원이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스텝지역이다. 서쪽으로 올수록 나지막한 야산이 멀리 보이고 여기 저기 나무들이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다. 더 서쪽으로 가면 차창은 자작나무 숲과 전나무 숲으로 채워지고 산이 제법 많이 보인다. 기차역이 아닌 곳에도 허름하나 매우 평화로워 보이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도 가끔 나타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다. 바이칼호수가 있는 시베리아 중부에 들어서면 높은 산이 연이어지고 시베리아의 대지는 울창한 숲으로 덮인다. 이런 곳을 타이가지역이라 한다. 지금 이곳의 낮 온도는 17도나 되어 제법 더위를 느끼지만 북쪽으로 가면 지평선까지 얼음으로 뒤덮인 동토지역이 나타날 것이다. 얼음으로 뒤덮인 곳은 어떤 모습이고 어떤 감동을 줄까? 문득 호기심이 발동하며 캄차카 여행을 선전하던 여행사의 홈페이지가 떠올랐다. 세계는 넓고 갈 곳은 많은데----. 아무튼 차창의 풍경이 변하지 않아 지긋지긋할 것이라는 예상은 한참 잘못된 것이었다. 차창의 풍경은 하루 밤을 자고 나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고, 하루에도 하늘, 초원, 습지, 실개천, 시내, 강, 나무, 숲, 야생화, 산, 마을---- 이런 것들이 무수한 조합을 이루며 끊임없이 바뀌어 결코 똑같은 풍경이 계속되지 않는다.

  창밖을 열심히 바라보며 MP3를 듣던 아내가 발라드 곡만 계속된다고 댄스곡이 저장된 폴더로 이동하는 방법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딸아이에게서 들었던 조작법을 상기하며 시도해 보았으나 워낙 건성으로 들었던 터라 알 수가 없었다. 이것저것 누르고 움직여 보는데 난데없이 ‘포맷 중입니다’ 라는 메시지가 뜨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포맷이라니! 다급하게 이것저것 눌러 보았으나 ‘포멧이 완료 되었습니다’라는 친절한 메시지만이 돌아왔다. 차곡차곡 장르별로 녹음되었던 183곡이 모두 날아가 버린 것이다. 정말 당황하여 심장의 박동이 빨라졌다.

“아이고 어쩌나, 포맷이 돼 버렸어”
“뭐라고? 왜 그래?”
“녹음이 다 날라 갔어!”

아내는 얼굴이 잠시 찌그러지는 듯 했으나 곧 평정을 되찾은 듯
“노트북으로 CD음악을 들으면 되잖아”라고 나를  안심시킨다. 아내의 장점은 좀처럼 나를 탓하거나 바가지를 긁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 장점이 발휘되는 것 같아 우선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사태는 여기서 수습되지 않았다. 내가 노트북을 꺼내 스위치를 넣자 윈도우의 초기 화면이 뜨지 않고 무슨 메시지가 잔뜩 나타났다. 아, 어제 새벽 악몽에서 깨었을 때 보았던 메시지 같았다. 이 키 저 키를 두들겨 보고 스위치를 껐다 다시 켜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맙소사, 노트북까지 고장이 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빌어먹을! 

“왜 그래요? 안돼요?” 아내가 걱정스럽게 말한다.
“고장인가 봐”
“아니, 멀쩡하던 컴퓨터가 고장이라니 무슨 이야기야! 당신 또 무슨 일을 저지른거야” 아내가 불신에 찬 눈초리로 힐문한다. 
   이건 내 잘못이 전혀 아닌데 내가 무슨 실수로 또 고장을 낸 것으로 단정하는 눈치였다.
“내가 고장낸 게 아냐” 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아내는 MP3를 망가트리고 노트북까지 고장낸 범인으로 단정하는 것이었다. 이 어이없는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짜증스러웠다. 그러나 아내는 ‘에이, 잠이나 자야지’ 라고 내뱉고 침대 위에 돌아누웠다.

  나는 식식거리며 앉아 있다가 이 컴퓨터를 설치해 주었던 사람에게 전화로 물어보면 혹시 해결법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다음 도착지인 이르쿠츠크에서 안내할 사람에게 전화하여 A/S를 받던가, 윈도우를 다시 깔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고 하면 될 것 같았다. 나는 살아날 길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예의 로밍 서비스 받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전화가 전혀 불통이었다. 통화권 밖이란다. 다음 큰 역에 정차하면 연결이 되겠지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음 역에 도착해도 불통이었고, 결국 이르쿠츠크에 도착할 때까지 끝내 터지지 않았고 속수무책이었다. 잔뜩 가져온 오비디오 기구와 CD, DVD가 모두 쓸모없어지고 핸드폰까지 먹통이라니!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어쩌랴.
 
 14.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아내는 좀처럼 나를 비난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그래서 먼저 싸움을 일으키는 일은 거의 없다. 대개 내가 화를 내는 통에 다툼이 일어난다. 그게 아내의 장점이다. 그런데 일단 다툼이 나면 그 원인이 자기의 잘못이라도 절대(?) 먼저 잘못을 인정하거나 애교라도 부려 분위기를 푸는 일은 없다. 내가 가만있으면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버틴다. 젊었을 때는 분명 자기 잘못인데도 3주간이나 버틴 일도 있다. 요새는 내가 하루가 지나지 않아 실없는 이야기라도 해서 분위기를 푼다. 그러면 아내는 언제 고집부리며 버텼느냐는 듯 화답해 준다. 그것도 아내의 장점이다. 지금은 더더욱 빨리 풀어야 할 상황이 아닌가! 나는 아내에게 ‘따끈따끈한 밥이 먹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물론 아내는 장점을 살려 금방 화를 풀고 ‘좋지’라고 화답했다.

   이 열차에는 승무원이 남자 한사람과 여자 한사람이 있다. 대개 시베리아횡단열차의 승무원은 여자들이지만 간혹 남자도 있다. 승무원 두 사람이 숙식을 같이 해야 하므로 이런 경우는 부부라고 보면 틀림없다고 최두칠씨가 이야기 했었다. 남자 승무원은 키가 크고 아주 호인이었다. 얼굴을 마주치면 항상 싱글벙글 미소를 짓는다. 여자 승무원(분명 남자 승무원의 아내일 것)도 하바로프스크까지 올 때의 여승무원에 비하면 훨씬 부드러웠다. 결코 상냥한 표정을 짓거나 미소를 보이는 일은 없지만.

  어제 볼펜을 기념품으로 주면서 승무원 방에 갔을 때 전자 레인지가 있는 것을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그 레인지는 이 위기를 극복할 복음이 아닌가! 나는 서울서 준비해간 햇반 둘을 들고 승무원 방으로 갔다.
“쁘라찌스째, 두바 미니트, �蠻캭뵀륫�
내 깐에는 ‘미안합니다만 2분만 부탁합니다.’ 라고 이야기 할 참이었다. 여자 승무원이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손가락 둘을 펴 보이며 웃는다. 나도 물론 고개를 끄덕.

  그래서 따끈따끈한 밥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방으로 돌아왔다. 어제 산 오이지(정말 피클이 아니고 오이지였다.), 장조림 통조림에 깻잎 통조림을 차리고, 서울서 준비해 갔던 볶은 고추장을 밥에 넣어 썩썩 비볐다. 꿀맛이었다.
 
  벌써 15년 전에 안식년 휴가를 맞아 하버드대학에 일년간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곳에 아는 사람이 없어 기거할 집을 구하지 못한 채 아내와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 둘을 데리고 무작정 비행기를 타고 가서 호텔에 머물며 집을 구했다. 모든 것이 생소한 곳에서 집을 구하느라고 정말 고생했다. 때려 치우고 서울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거의 일주일을 호텔에 머물다가 겨우 집을 구해 들어갔다. 우선 급한 대로 전기밥솥에 밥을 하고, 들고 갔던 고추장을 꺼내 뜨거운 밥에 비벼 네 식구가 골판지를 깔고 주방 바닥에 앉아 먹었다. 태어나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는 느낌이었다. 아마 식구 모두가 불안과 긴장 속에 어설픈 양식으로 하루 세끼를 때우며 긴긴 일주일을 보내다가 집을 구해 들어왔다는 안도감이 밥맛을 더했으리라. 아무튼 그 때의 그 감격스럽던 고추장 비빔밥! 정말 최고였다고 지금도 가끔 우리 식구는 그 맛을 이야기 하곤 한다. 이번 여행을 떠나며 아내가 볶은 고추장을 큼직한 통에 넣어 준비했고, 나도 그 위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은 그 경험 때문이었다.  
                
  식당에 맥주를 마시러 갔다가 뜻밖에 일본인 젊은 남자 둘을 만났다. 반가웠다.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낮선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여행길에 만난 사람은 금방 친해지고 기약 없이 헤어지는 낭만이 있다. 이 두 젊은이는 같이 니이카타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배로 와서, 시베리아 횡단철도 전 구간을 중간에 쉬지 않고 154시간 계속 달려 모스크바까지 가는 길이란다. 한 친구는 다시 키에프를 경유 몰다바로 가서 크리스마스까지 머물고, 또 한 친구는 베를린으로 가서 1년간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체재비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충당할 계획이라고. 나중에 이들을 통해 알게 된 일본 여자는 33살의 노처녀인데 핀란드까지 간다고 했다. 여자 혼자의 몸으로 호텔 예약도 없이 무작정 여행길에 올랐다고 하여 우리를 놀라게 했다. 모두 여행에 미친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맥주를 같이 마시며 우리는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우리 방 다음다음 칸에는 70이 넘었다는 일본인 노인 부부가 타고 있었다.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부인이 아주 오래 전부터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는 것이 꿈이었단다. 더 늙기 전에 꿈을 이루기 위해 가게를 닫고 여행길에 올랐다고 너무나 행복해 했다. 디스크 수술까지 받은 적이 있다는 이 70 노인의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올 가을에는 베를린에 가서 베를린 필하모니의 콘서트를 꼭 볼 생각이라고 약간 으스대는 투로 말했다.  이들 부부는 여행 가이드 한명이 여행 기간 내내 같이 움직인다고 했다. 가이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는 20살 정도의 러시아 처녀였다. 일본말을 아주 유창하게 하고 상냥하고 귀여웠다. 우리는 이 가이드에게 만일 통역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탁하기로 했다. 그녀는 흔쾌히 자기의 6인실 방 번호를 알려 주었고, 말이 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나의 마음을 훨씬 편하게 했다.
 
 15. 회상

  기차가 강을 끼고 달린다. 강물을 보며 나는 문득 25년간 일했던 연구원을 생각했다. 1980년 봄, 일본에서 돌아와 연구원에 처음 갔을 때, 얼마 전 고인이 되신 김보현 원장님과 인터뷰가 있었다. 매우 부드러우나 예리한 눈빛으로 나를 건너다보시며 ‘일본 농업은 잘되고 있다고 보세요?’ 라고 물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부터 꼭 25년이 지난 5월에 연구원을 떠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무역회사에 일한 적이 있고 농촌진흥청에서 일년 정도 일한 적도 있지만, 농촌경제연구원은 내가 정말 열정을 바쳐 일했던 곳이다.
 
  책임연구원으로 2년간 있으며 마음 고생했던 기억, 그러나 농업금융의 혁신을 주장하는 첫 번째 보고서를 냈을 때의 뿌듯함, 직급별 T/O를 없애야 한다고 집단행동을 하던 기억, 기획조정실장을 하며 넘치던 의욕과 허탈함, 심혈을 기울여 쓴 ‘농업의 구조조정 그 시작과 끝’ 이라는 대담한 제목의 책이 출판되었을 때의 기쁨과 아쉬움, 오랜 숙원이던 농업부문모형 KREI-ASMO가 탄생하던 기쁨, 관측센터를 맡아 새벽까지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정말 졸려서 몇 번이나 깜박 잠들어 소스라치게 놀라던 기억, ------

  자기 월급으로는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기도 어렵다고 말하는 젊은 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 아프던 기억, 퇴직 후 대책이 깜깜하다는 동료의 탄식에 우울하던 기억, 소외되고 있다고 푸념하던 어떤 박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답답하던 기억, 복도통신에 귀를 쫑긋거리는 모습을 보며 느끼던 분노, 연구원 보고서와 성과를 힐난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느끼던 안타까움,-------. 그런 좌절감을 씻어내고 모두가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살수 있게 하는 것이 나의 희망이었는데----. 그러나 연구원을 떠나던 날 나는 ‘여러분이 사람답게 자존심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3년간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과연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지 부끄러울 뿐이다.’ 라고 이야기 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작년 말인가 올해 초 한 직원이 내가 원장 재출마를 하는지 모두가 궁금해 한다며 ‘아마 생각이 많으시겠죠’ 라고 했을 때 ‘생각 많이 할 것 없이 이미 정해진 대로 자연스럽게 될 것’이라고 했던 기억, 그러나 가끔 정해진 대로 되지 않기를 막연히 기대해 보는 나를 보고 스스로 실소하던 기억, 그리고 내가 마지막 떠나던 날 많은 연구원 가족들이 따뜻이 배웅해 주던 기억이 가슴을 적신다. 연구원을 떠나게 되었을 때 연구원에 대한 나의 애착 이외의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25년의 삶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기 위해 연구원 일은 가능한 한 잊으리라 생각했지,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시베리아 여행을 떠나 격리된 시간을 갖기로 마음먹었지.

  (그러나 세상일은 반드시 내 생각대로 되지는 않는 법. 잔뜩 준비한 오비디오 장비가 쓸모없는 짐만 되어 버리듯.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세상은 변해 있었다. 연구원 이전 문제가 황당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고 후임 원장 선임 문제로 여러 가지 이야기가 흘러 다녔다.  그래서 ‘세상일이란 정말 한치 앞을 보기 어렵다.’ 라고 이야기했던 것이리라.)
 
   회상과 회한에 잠겨 있는 사이 다시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물들고 기차는 태양을 붙잡아 두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린다. 아, 시베리아횡단열차는 오늘도 태양을 향해 달리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