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J인스티튜트 이사장 이정환

식량은 곡물이고, 식량안보(food security)는 곡물을 자급해야 달성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그러나 이미 30년 전 세계식량정상회의(World Food Summit)는 식량안보(food security)를 '모든 사람이 항상 각자의 식습관과 기호에 맞는 안전하고 영양가 있는 먹거리(food)를 물리적 경제적으로 능히 조달해 건강하고 활발한 삶을 이루는 상태'라고 규정했다. 다시 말하면 매일 마주하는 밥상을 지키는 일이 식량안보다. 이를 위해 수입도 필요하고 비상시에 대비한 비축도 필요하다.

그러나 밥상은 그 지역의 기후와 풍토라는 생산 환경과 오랜 식습관이 만들어 낸 문화이므로 이를 지키려면 우리 농업이 건재해야 하고, 이를 담당하는 농가가 튼튼해야 한다.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농가의 존재 자체가 식량안보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농가가 시장수요에 따라 농산물을 생산하고 그 결과로 농가소득이 증가해야 한다.

매일 마주하는 밥상 지키는 일이 식량안보

따라서 정책은 단순히 농가를 지원하는 게 아니라 농가의 생산활동을 제약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데 중점을 두어 농업과 농가가 상생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요소가 여럿 있지만 농가는 다른 산업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위험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주요 채소류의 최근 20년 사이 연간 가격 변동률이 품목에 따라 15∼40%나 되어 제조업 제품 평균 가격 변동성의 1.5배가 넘는다. 가격뿐이 아니다. 주요 농작물의 수량이 추세 대비 최대 9∼36%나 변동했다. 농가는 올해 가격이 좋을 농산물, 작황이 좋을 작물을 잘 찍어야 하는 투기적 행동에 내몰리고 가격은 더 널뛴다. 거기에 때때로 홍수 피해까지!

드디어 농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100가지 지원보다 개별농가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이 위험을 관리해 주어야 농가가 유지되고 젊은 농업인도 들어올 엄두를 낼 것이다.

농업 대국 미국 농정이 위험관리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은 50여년 전부터 가격손실보전제도(PLC 등)에 의해 주요 농산물가격이 기준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그 부족분의 85%를 보전한다. 또한 작물보험 제도가 40여년 전부터 뿌리를 내려 대부분 작물의 거의 모든 면적이 흉작의 공포에서 벗어나 있다. 그뿐 아니라 단수 50% 이상의 대손실은 정부 지원으로 보전하는 대재해보험제도(CAT)가 작동해 작물보험의 부담을 덜어준다. 과수 가축 등이 자연재해로 멸실하거나 사망하면 보완적농업재해지원제도(SADA) 규정에 따라 복구비를 지원한다. 이런 기초 위에 차례로 작황과 가격 위험을 동시에 커버하는 수입보험(Revenue Insurance)제도, 수입 감소를 보전하는 수입손실보상제도(ARC)를 도입해 경영 안전망을 더 촘촘히 짰다.

작물보험 확충과 가격위험완충 장치부터 시작

우리나라에서도 근래 농가 위험관리에 주목하는 것은 다행이다. 올해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폐기된 후 정부는 경영안정직불제도를 대안으로 검토한다고 했다. 그리고 개별농가의 농업수입이 기준연도 수입보다 감소하면 그 차액을 보전하는 미국식 농가 단위 수입손실보상제도(ARC-IC)가 유력한 대안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왜 농가 ‘수입액’을 보전하는가? 개별농가의 수입액을 파악할 수 있는 농가별 판매가격과 단수 자료가 있을까? 이미 15년 전 비슷한 제도를 시도하다가 왜 접었을까? 미국에서도 이 제도는 거의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보다 2015년 시작된 우리나라 수입보험제도는 왜 아직도 시범사업에 머물고 있을까? 위험관리제도를 도입하려는 생각은 반갑다. 그러나 현실적 여건과 시급성을 따져 일의 순서를 정해야 한다. 의욕이 앞서 걷기도 전에 뛰려고 해서는 안된다. 작물재해보험 대상 농산물이 67개로 확대는 됐으나 가입률이 50%도 안되는 작물이 대부분이다.

우선 대부분 농업생산이 작물보험의 품 안에 들어오게 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의 대재해보험제도(CAT)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 동시에 혹심한 가격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줄 가격손실보전제도(PLC)를 빨리 도입해야 한다. 그리고 여건을 갖춰 다음 단계 안전망 제도로 가는 것이 일의 순서다.

[출처: 내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