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J인스티튜트 이사장 이정환

 최근 수년 사이에 유럽연합(EU)의 농정개혁 경험이 특히 자주 거론된다. EU는 강력한 가격지지 정책으로 농산물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변신한 후 농정목표를 농업에서 환경과 농촌 중심으로 전환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우리나라는 과도한 농약 사용과 축산분뇨 문제를 안고 있고 급속한 인구유출로 농촌 소멸을 걱정하는 상황이므로 환경과 농촌 중심으로 전환한 EU 농정은 매력적인 모델로 다가온다. 그 연장선에서 농업의 공익적 기능과 이를 위한 공익형직불 중심 농정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EU는 출범 당시부터 ‘먹거리 안보’를 가장 중요한 농정목적으로 설정했고, 그후에도 일관되게 이것을 첫번째 목적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적정한(fair) 농가소득 보장과 경쟁력 향상을 목표로 제시해왔다. 여기서 ‘먹거리 안보’란 식량자급률 제고를 넘어서 ‘보통 소비자가 원하는 먹거리를 적정한 가격에 안정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먹거리 안보’를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은 EU 농정

농업의 본질은 태양에너지를 농축해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므로 농정의 기본목적이 먹거리의 안정적 공급에 있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숲을 개간하고, 거기에 씨를 뿌리고, 잡초와 곤충을 제거하므로 농업은 생물 다양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농작물이 되도록 많은 태양에너지를 농축하도록 물과 비료 농약 에너지를 투입하고, 그 과정에서 물질순환을 교란한다. 축산업은 이렇게 농축된 태양에너지를 동물의 소화작용을 이용해 지방과 단백질로 전환함으로써 에너지 밀도가 높고 풍미가 다른 새로운 먹거리를 인간에게 공급하지만, 그 과정에서 소화된 찌꺼기가 환경부하를 높인다.

농업생산 활동이 환경과 생태에 부담을 주어 드디어 사람들의 삶의 질을 위협하게 되면 사회는 먹거리를 일부 포기하더라도 그런 농업생산 활동을 거부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태환경 보전과 기후변화 대응은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사회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고, 먹거리 생산이라는 기본목적 달성과정에서 충족해야 할 제약조건이기도 하다. EU 농정개혁은 이러한 제약조건을 효과적으로 충족하려는 노력의 여정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농업이 다원적 기능을 생산하는 공익산업이라든지, 농업보다 환경과 생태를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은 목적과 제약조건을 혼동하는 것이다. 농업이 탄소흡수, 지하수 함양, 야생동물 먹이공급, 농업경관 등 공공재적 기능을 하지만 자연상태를 능가하기는 어려우므로 공공재 생산이 농업의 존재이유가 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가 모델로 거론하는 EU 농정은 출범 후 가격위험을 관리하고 공급안정을 지원하는 역할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미국 농정도 다르지 않았다.

또한 2000년대 들어 농촌정책이 EU 농정의 전면에 등장했지만, 농업의 경쟁력 향상을 첫번째 목표로 하고 있다. 사회복지 제도나 도로 교통 생활환경 개선이 중심인 우리나라 농촌정책과 사뭇 다르다. EU 농촌정책은 지역의 자원 조건과 특성을 반영해 먹거리 안보라는 목적과 환경생태적 제약조건을 효율적으로 달성하려는 농업정책 방식의 변경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 농업, 소비자 욕구 충족시키기에 역부족

우리나라 농업은 과연 기본목적인 먹거리 안보 능력을 높이는 데 성공하고 있는가? 보통 소비자가 원하는 먹거리를 점점 더 쉽게 안정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상태로 가고 있는가?

쇠고기 가격은 10년 전보다 실질가격으로 65%나 상승해 100g당 1만원을 넘어섰고, 쌀값도 20% 정도 올라 20kg당 6만원을 넘었다. 그뿐 아니다. 최근 10년 사이에 건고추 마늘 대파 등 양념채소류 실질 도매가격은 급등락을 반복하며 적어도 25% 이상 상승했고, 배와 복숭아, 콩 가격도 적잖게 올랐다. 수입이 자유화되었음에도 이 모든 국내산 농산물의 가격이 이렇게 상승하는 것은 수입품으로 충족될 수 없는 소비자 욕구는 강하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우리나라 농업의 힘이 달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도 대부분 농산물의 재배면적은 빠르게 감소하고 가격은 더욱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먹거리 안보 능력이 위협받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EU 농정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농정개혁의 방향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