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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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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야기(2), 明의 국내외 상황과 외교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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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이야기(2), 明의 국내외 상황과 외교전략   

   

 

오호성 (성균관대 명예교수)

 

 

 

1) 明의 건국과 외교정책

 

  주원장(朱元璋)은 1368년 몽고(元)를 북쪽으로 밀어내고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홍무제로 일컫는 태조 주원장은 중국에 다시 한민족 국가를 건설한 후 모든 몽고 풍속을 금지하고 황제 중심의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는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사방으로 원정을 감행하여 영토를 넓혔다. 영락제 때 명나라의 영토는 북쪽으로 몽고와 접하면서 동쪽으로 만주의 흑룡강과 연해주, 서쪽으로 서장과 티베트의 일부, 남쪽으로는 베트남을 정벌하여 그 일부를 손에 넣었다. 영락제는 태국과 버마의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영락제는 정화(鄭和)로 하여금 전대미문의 대규모 함대를 편성하여 동남아 제국과 인도ㆍ페르시아ㆍ아라비아 지역의 국가들을 방문하고 조공을 요구하는 한편 아프리카의 동해안의 소말리아까지 탐험하게 하였다.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 항로를 발견하기 93년 전의 일이었다.

 

 명나라 외교정책의 기본 방향은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입각하여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란 중국이 황제국가로서 세계의 중심에 있고 다른 나라들은 황제가 인정하는 제후국가로 존재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중국이 제후국가를 통제하는 수단은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이었다. 책봉은 명나라의 황제가 변방국의 최고 지도자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조공이란 변방국가가 특산물을 중국에 예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은 복속된 국가가 바치는 조공에 대해 그 만큼 또는 그 이상의 답례품을 주는 형식을 갖추었고 조공사절이 개인적으로 가져오는 물건은 무역을 허락하였다. 명나라는 홍무제 때부터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조공무역을 유지하기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중국은 조공무역 외의 외국과의 무역을 금지하고 다만 중국이 개설하거나 인정하는 시장을 통하여서 만 교역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조공과 책봉이라는 중국의 전통적 외교방침에서 파생된 또 다른 하나의 국가전략이 이이제이( 以夷制夷)이다. 이이제이는 오랭캐를 이용하여 다른 오랑캐를 제어한다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중국의 교화가 미치지 않는 오랑캐가 중국을 침입할 때는 다른 오랑캐나 조공국으로 하여금 이를 막도록 한다는 개념이다. 중국은 오랫동안 중화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조공과 책봉, 이이제이 전략을 기본 방침으로 사용하여왔고 명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2) 北虜南倭 문제

 

 (1) 北虜

 

 15세기 중반까지 명나라는 세계적 강국이었다. 해마다 거두어 들이는 토지세 만도 3천만 석을 넘었고 상비군은 약 3백 만에, 인구는 약 7천 만에 달하였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 왜구가 다시 명나라의 동남해안을 거점으로 약탈과 노략질을 계속하고 북쪽에서는 몽고세력이 다시 힘을 길러 빈번하게 국경지방을 침입하였다. 명나라는 토목보(土木堡)의 변(變)이후 북로남왜(北虜南倭)와 내정의 문란으로 서서히 국력이 기울기 시작하였다.

 

 북로(北虜)란 북방으로부터의 몽고족의 침공이고 남왜(南倭)는 남쪽 연안에 대한 일본 해적의 약탈을 말한다. 주원장에 의해 중국에서 북쪽으로 쫓겨간 원(元)에서는 16세기 초부터 몽고의 고원을 근거지로 하는 오이라트 부족의 세력이 강성해졌다. 1449년 오이라트의 군사가 대거 명에 침입하자 영종 황제는 친히 50만 대군을 이끌고 대동(大同)까지 친정(親征)하였다가 토목보(현재 하북성 회래현)에서 몽고군의 기습을 받고 대패하여 황제가 포로로 잡혀가는 봉변을 당했다.

 

 토목보의 변 이후 명은 약 1백 년에 걸쳐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수축하였다. 산해관으로부터 영하에 이르기까지 장성을 따라 많은 수의 邊鎭(변진)을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국방비가 재정의 최대 항목이 되었고 증강된 상비군에 대한 군량보급 때문에 명 군사제도의 기초인 군호(軍戶)와 둔전(屯田)제도가 무너지게 되었다.

 

 15세기 후반부터는 몽고에서는 타타르 족이 강성해져 현재의 내몽고 지역을 통일하고 새로운 지배체제를 형성하였다. 알탄(俺塔) 칸이 이끄는 몽고는 오르도스를 근거지로 삼고 1520년대 초부터 명나라의 북변을 끊임없이 침공하였다.

 

 알탄은 1542년 명의 하북성과 산서성 깊숙한 곳까지 침입하여 20여 만 명의 백성을 죽이고 8만 호의 가옥을 불태우고 거침없는 약탈을 자행하였다. 특히 1550년에는 수도인 북경을 수일 동안 포위하는 등 급박한 상황(庚戌의 變)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명은 이들을 막기 위하여 수많은 병력을 동원하였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1570년 명나라는 알탄을 순의왕(順義王)에 봉하고 명과 교역할 수 있도록 국경지방에 마시(馬市, 시장)을 개설해 준 다음에라야 겨우 진정 시킬 수 있었다.

 

 (2) 南倭 

 

 명 태조는 일본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감합무역(勘合貿易)을 받아들였다. 명나라는 일본의왕을 책봉하지는 않았으나 조공무역과 같은 성격인 감합무역을 허가하였다. 조공무역은 일본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명나라는 조공선에 대하여 세금도 물리지 않았고 사절과 수행인에 대한 체제비도 받지 않았다. 조공품에 대해서는 사여(賜與)라는 명목으로 가격 이상의 값을 치러주었다. 또 조공품과 별도로 가지고 간 물건은 교역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무역선은 한 차례의 운항만으로도 5~6배의 이익을 거두었다.

 

 일본은 내란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힘이 쇠락하면서 무역의 관리권이 호소카와(細川)와 오우치(大內)등의 유력한 다이묘(大名)의 손으로 넘어갔다. 일본의 양대 상업지역인 대판 근교의 사카이(堺) 상인들은 호소카와를 등에 업고, 구주(九州)의 하카다(博多)상인들은 오우치를 후견인으로 삼아 무역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였다. 1523년 양 쪽의 조공사절이 명나라의 영파(寧波)에서 입항 순서를 다투다가 충돌하였다. 여기서 패배한 하카다 상인들이 흥분하여 영파시에 불을 지르고 인명을 살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명나라는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일본의 조공무역을 금지하였다. 명나라는 이 사건을 기화로 모든 해상무역을 금지하고 명나라 해안에서 일정 크기 이상의 자국 선박이 출항하는 것도 막아버리는 등 해금(海禁)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명ㆍ일 간의 무역이 금지되자 명나라의 해역에 왜구(倭寇)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해금정책으로 무역을 할 수 없게 된 일부 명나라 상인들도 왜구와 합세하여 해적이 되었다. 명나라에 온 포르투갈 상인들도 명과의 합법적 교역을 할 수 없게 되자 왜구의 무리에 합류하였다. 일본인이 아닌 자들로 왜구가 된 자를 가왜(假倭)라고 하였다. 왜구들은 1557년 명의 내륙지방 절강성ㆍ안휘성 깊숙이 쳐들어와 남경(南京)을 점령하고 강서성을 공격하여 4천여 명의 중국인을 살해하면서 80여 일 동안 각지에서 노략질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명은 왜구를 격퇴하기 위하여 많은 비용을 들여가며 노력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명은 만력제(神宗)때 착계광(戚繼光)이란 장수를 발탁하여 왜구를 막게 하였다. 척계광은 새로운 군사를 뽑고 훈련하여, 왜구의 주력을 격파하였다. 이로써 약 40년간 계속되던 왜구도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왜구를 진압한 다음에 명은 교역을 금지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567년 해금을 철회하였다. 명이 해금정책을 철폐하고 무역의 再開와 중국인의 해외 도항을 인정 함으로서 왜구의 발생 기반을 없애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3) 산업의 발전과 銀本位經濟의 확립

 

 (1) 세금의 은납화

 

 명나라에서는 15세기 후반기부터 정치적인 혼란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변화와 발전이 시작되었다. 명나라는 강남에서 시작된 농업과 수공업의 발달이 도시화와 상업의 발달을 이끌었다. 명나라의 비단과 자기는 그 품질이 뛰어났다. 명나라는 16세기 중반에 들어와 세금을 은으로 받았고 정부의 지출도 은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하였다. 명나라는 은본위경제 시대에 진입하였다.

 

 명나라의 건국 초기에는 현물경제 시대였다. 백성들은 세금을 쌀ㆍ보리ㆍ생사 등 현물로 납부하였다. 정부도 문무백관의 녹봉과 정부의 비용 지출도 현물로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명은 점차 경제규모가 커지자 대명보초(大明寶鈔)라는 지폐를 발행하고 보조화폐로 은과 동전을 함께 통용시켰다. 그러나 지폐를 너무 많이 발행하여 지폐의 가치가 떨어지자 민간에서는 동전과 은을 선호하기 시작하였다.

 

 銀을 중심으로 한 화폐경제의 침투는 농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구가 조밀하고 농업 생산력이 높은 강남의 델타지역에서는 15세기 중반부터 농민들이 세금과 소작료 및 요역(腰役)을 현금(銀)으로 지불하고 가계 수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새로운 생산 활동을 시작하였다. 환금작물의 재배, 부업적 가내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증가하였다.

 

 그 결과 면화, 양잠, 쪽, 사탕수수, 차 등의 보급과 재배가 확산되었다. 또 이것을 원료로 한 가내 공업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특히 농촌에서의 면업(綿業)과 견업(絹業)의 확대에 힘입어 농촌 마을은 한층 급속도로 발전하여 지방 도시로 발전되었다. 생산의 전환을 하지 못하여 빈곤에 빠진 농민들은 도시로 유입되고 일부는 해외로 빠져나가 화교가 되었다.

 

 중소 도시에서는 면화와 견사를 이용한 직조업과 기타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도시에는 명주와 생사 도매상들이 줄지어 생겨나고 다른 연관 상인들도 들어와 상업이 번성하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직기(織機)를 들여놓고 기술자를 고용하여 직접 비단을 짜는 상인도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수공예품과 철물ㆍ도자기 등 다른 상품으로 확대되고 또 강남지방에서 다른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2) 산업의 발전과 도시화

 

 16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생산도시의 성격을 갖는 도시가 나타났다. 예를 들면 도자기로 유명한 경덕진(景德鎭)에는 16세기 중반에 벌써 관영ㆍ민영의 도자기 공장이 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섰고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수도 수만 명에 달하였다. 송강(松江)은 면포 거래의 중심지가 되었고, 소주(蘇州)ㆍ가흥(嘉興)ㆍ항주(杭州) 등은 생사와 견직물의 생산과 거래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도시를 무대로 한 새로운 생산활동과 유통망의 확대를 중국의 역사가들은 자본주의의 맹아(萌芽)라고 보는데 이런 경제활동이 일어난 대표적인 곳으로 소주를 들고 있다.

 

 소주의 비단 제조 기술은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다. 소주에서 만든 견직물은 황실과 부호들이 애용하는 상품이었으며 유럽에서도 환영 받는 최고급 수출품이었다. 소주의 직물업자 수는 명 말에 약 1만 호에 이를 정도로 중국 최대의 비단의 집산지로 전국의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명의 도자기도 중국의 주력 수출품의 하나로 서구에서 큰 환영을 받으며 비싼 값으로 팔렸다.

 

4) 張居正의 내정개혁

 

 (1) 土地丈量과 一條鞭法

 

 명나라는 북로남왜의 퇴치를 위해 애쓴 결과 막대한 재정적자를 안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명의 경제는 은경제 체제 속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갔다. 세금과 부역을 은으로 납부하게 된 농민들은 은이 부족하여 납세의 부담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농민들은 은을 구하기 위하여 싼값으로 쌀을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빚을 지게 되었다. 농가부채의 누적으로 특히 가정ㆍ융경 연간에 농민들은 토지를 헐값에 방매하는 사람이 많았다.

 

 1572년 임진왜란을 치른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1572-1620)가 즉위하였다. 신종은 어렸을 때 선생이었던 장거정(張居正)을 내각의 대학사로 임명하였다. 장거정은 황제의 신임을 바탕으로 그가 재상으로 있던 10년 동안 국방을 튼튼히 하고 토지개혁과 세제개혁을 비롯한 일련의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는 척계광(戚繼光)을 후원하여 왜구를 몰아내고 또 북쪽의 국경도 안정시켰다. 황하의 수리시설을 복구하여 경지면적을 확대하고 대운하를 준설하여 강남에서 북경까지의 물자 수송능력도 제고하였다.

 

 장거정은 세금의 탈루를 막기 위하여 전국적인 토지장량(土地丈量)을 실시하였다. 토지장량이란 토지조사를 말한다. 장거정은 토지조사를 위하여 전국의 농지를 새로 측량하여 어린도(魚鱗圖)라는 지적도를 만들고 토지의 소유자와 면적, 평균생산량 등을 확실히 파악하여 문서화하였다.

 

 장거정은 토지조사의 바탕 위에서 각종 세금과 요역을 통합하여 銀으로 납부하도록 하는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실시하였다. 일조펀법이란 종래 부(賦)와 역(役)으로 나누어 부과하던 세금을 하나로 합치고, 호(戶)와 인정(人丁) 단위로 부과하던 역을 토지 단위로 바꾸고 모든 세금은 은으로 납부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종래의 역(役)은 납세자가 직접 노역에 나서는 것이었는데 일조편법에서는 노역 대신에 은을 내게 하고 관청은 그 돈으로 인부를 고용하여 일을 시켰다.

 

 장거정의 개혁은 큰 성공을 거두어 명나라의 경제를 중흥하고 황실의 재정을 안정시켰다. 이로 인해 장거정이 죽고 난 후 10년간은 재정이 안정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장거정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1582년에 죽었는데 그는 송나라의 왕안석(王安石)과 함께 개혁정치가로 중국 역사에서 높이 평가 받는 인물이다.

 

 (2) 유럽인의 동양 진출이 명ㆍ일에 미친 영향

 

명나라는 산업의 발달로 은경제로 전환하였으나 銀의 공급이 부족하였다. 명나라에도 상당 수의 은광이 있었으나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은의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였다. 상인들은 해외로부터 은을 조달하는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세계는 대항해 시대를 맞이하여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상인들이 동남 아시아와 중국에 다투어 진출하였다. 명나라의 상인들은 이들과 교역을 함으로써 멕시코와 일본 등 외국의 은이 대량으로 명나라에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멕시코와 일본에서 들어온 은은 명나라의 화폐 공급부족 문제를 해소하고 경제의 상장과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명나라와 일본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람들을 통하여 새로운 지식과 무기를 얻을 수 있었다. 명나라 사람들은 포르트갈 상인을 통하여 불랑기포(佛朗機砲)라는 후장식(後裝式) 대포를 입수하였고 일본은 1543년 포르투갈인을 통하여 鐵砲(조총)과 화약을 얻고 그 제조법을 익혔다. 불랑기포와 조총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일본은 조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군대의 편제는 물론 전술개념과 전투방식까지 바꾸었다. 구라파의 새로운 지식을 명나라에 전해 준 마테오 리치가 명나라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1582년이었다. 그는 명나라 사람들에게 수학ㆍ기하학ㆍ천문학ㆍ지도 제작법 등을 전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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