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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7.05.10
제목
임진왜란 이야기(1), 16세기 세계정세와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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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이야기(1), 16세기 세계정세와 동아시아   

   

 

오호성 (성균관대 명예교수)

 

 

 

1)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인도 항로의 발견

 

  15세기 중반 오스만 터키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1천 1백여 년을 지탱해오던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 오스만 터키는 아테네를 비롯한 지중해의 도시국가들과 이집트 등 아프리카 연안의 국가를 정복하여 지중해의 제해권을 손에 넣었다. 이슬람교를 믿는 터키인들은 비단길을 통해 들어오던 중국의 비단과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들여오던 인도의 향신료 등 동양의 상품에 비싼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하였다.

 

 유럽의 상인들은 육로를 통하여서는 더 이상 싼 값으로 동양의 비단과 향신료 등을 사들이기 어렵게 되자 동양으로 가는 바다 길을 찾게 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15세기 말 아프리카의 희망봉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하였다.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동쪽으로 항해하여 마침내 인도로 가는 길을 찾았다. 그는 인도의 칼리컷에 도착하였다. 1519년에는 스페인의 마젤란이 세비야를 출발하여 인류 최초로 지구 일주를 위한 항해를 시작하였다. 마젤란은 1521년 태평양을 횡단하여 필리핀에 도착하였다. 이들이 항해에 나선 것은 신세계에서 금ㆍ은과 향신료 등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16세기는 대항해와 탐험의 시대였다. 조선술과 항해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갤리온과 같은 큰 배를 만들어 대포를 장착하고 나침반을 이용하여 대양을 항해하였다. 지도 제작술이 발달하고 해양에 대한 지식도 증가하였다. 새로운 항로가 열리면서 미지의 땅이 발견되고 동양과 서양의 물화가 활발하게 교역되기 시작하였다.

 

2) 16세기 동아시아의 정세

 

  16세기 아시아에 처음 나타난 유럽인은 포르투갈인이었다. 1510년 포르투갈 함대가 인도의 서남해안에 있는 고아를 점령하여 그들의 해군기지로 삼았다. 고아는 포르투갈의 아시아 전진기지가 되었고 가톨릭 전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듬해 포르투갈 함대는 말라카 해협을 끼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인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를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포르투갈은 말라카에 상관을 설치하고 동방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

 

  말라카는 포르투갈인이 오기 전에 이미 아라비아와 예멘에서 온 아랍 상인들과 인도인ㆍ중국인ㆍ자바인ㆍ태국인ㆍ유구인 등 여러 민족들이 복잡하게 얽혀 교역하는 국제적 교역의 거점이었다. 말라카는 향신료로 사용되는 육두구와 정향의 원산지였다. 인도는 계피와 후추의 원산지였다.

 

  1517년 포르투갈의 국왕은 명나라의 광주에 5척의 함대를 보내 명나라에 통상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해금정책(海禁政策)을 통하여 자국인의 해외무역과 또 외국인이 명나라와 무역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명의 동남 해안에서 명나라의 밀수 집단과 왜구와 함께 밀무역에 종사하였다.

 

  16세기 중기는 포르투갈ㆍ스페인 등 유럽 세력이 중국 연해에 나타난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후기 倭寇가 명나라에서 활동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당초 향신료을 얻기 위하여 인도에 온 포르투갈 상인들은 말라카에서 유구와 일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인도의 고아, 말레이의 말레카, 중국의 마카오, 포모사(대만),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 무역 거점을 설치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영토의 획득이 아닌 해상교역 네트워크를 건설과 천주교의 선교에 관심이 있었다.

 

3) 銀을 매개로 한 동아시아의 국제무역

 

 포르투갈 상인들은 리스본을 떠날 때 무역선에 모직물, 유리 세공품, 영국과 핀란드제 시계, 포르투갈의 포도주 등을 적재하고 동양을 향하였다. 포르투갈 무역선은 이것을 명나라에 가지고 가서 비단과 생사(生絲)ㆍ도자기로 교환하였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또 동남아와 중국에서 구입한 약재ㆍ胡椒(후추)ㆍ비단ㆍ생사 등을 일본으로 가지고 가서 일본산 금ㆍ은과 교환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막대한 양의 은이 생산되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귀국할 때 중국과 동남아에서 비단ㆍ도자기ㆍ향신료ㆍ진주ㆍ칠기 등을 사가지고 구라파로 돌아왔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한 번의 항해로 투자 자본의 몇 배에 달하는 이윤을 얻었다.

 

  대 명 무역의 다른 한 축은 스페인 상인들이 담당하였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명령으로 조직된 태평양 원정대는 1565년 필리핀의 세부를 점령하고 마닐라 시를 건설하였다. 당시 명나라의 복건ㆍ광동 지방의 상인들은 해금정책으로 스페인과의 교역이 금지된 상태에 있었는데 이들은 몰래 마닐라로 건너가 스페인 상인들과 밀무역을 하였다. 중국 상인들은 스페인에 비단ㆍ견사ㆍ면포ㆍ도자기 등을 팔아 넘기고 남미에서 생산된 은화를 받았다. 스페인 인들은 중국의 특산물을 스페인으로 가져가 많은 이익을 얻었다.

 

  이 무렵 스페인은 남미 볼리비아의 포토시(Potosi)에서 거대한 은광을 발견하였다. 여기서 채굴한 銀은 멕시코로 보내져 멕시코산 은과 함께 은화로 주조하여 멕시코 銀으로 통용되었다. 스페인은 멕시코 은화를 다량으로 구라파에 공급하여 멕시코 은화는 당시 세계적 기축통화가 되어 국제 화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스페인은 이 은으로 무적함대를 건설하는 등 세계적 강국이 되었다.

 

 16세기 중반 명나라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몽고족의 계속적인 침입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명나라는 몽고족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하여 만리장성을 수축하고 수많은 변진을 건설하였다. 북방에서의 군사력 강화는 많은 재정지출을 요구하였고 당시 화폐로 사용하던 은의 수요를 촉발 시켰다. 명나라는 1567년 그 동안 금지하였던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허가하고 1573년에는 스페인과의 무역을 인정 함에 따라 외국의 은화가 본격적으로 중국경제에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1581~1600년 간 멕시코 및 남미 산 은의 총생산액은 연평균 1천만 달러에 달하였는데 이 가운데 약 25% 정도인 200만 내지 300만 달러가 스페인 인에 의하여 명나라로 유입되었다는 연구도 있다. 이 무렵 일본과의 교역으로 포르투갈 상인이 획득한 일본 은의 양이 연간 약 230만 냥에 달했는데 이 은은 대부분 중국의 특산물을 구매하는 데 사용하였다. 은본위 경제로 진입한 명나라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인에 의하여 공급되는 은으로 경제성장을 계속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하며 막대한 전비(戰費)를 투입하였다. 명나라의 전비는 대부분 스페인과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통하여 획득한 은으로 조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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