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모삼(朝四暮三)에서 배우는 발상전환의 지혜

 

윤 여 임 (조란 목장 대표)
joran1958@naver.com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고사

 

  송(宋)나라에 저공(‘저(狙)’란 원숭이를 뜻한다)은 많은 원숭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먹이를 대는 일이 날로 어려워졌으므로 원숭이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앞으로는 도토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朝三暮四)’씩 줄 생각인데 어떠냐?” 그러자 원숭이들이 배가 고프다며 화를 내자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朝四暮三)’씩 주마.”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했다. 여기서 원숭이는 속았고 저공은 속인 것이다. 저공은 나쁘고 원숭이는 바보다.
  위와 같은 연유로 조삼모사란‘간사한 꾀로 남을 속여 희롱하는 말’이라고 사전에서는 말한다.

 

 

한미FTA 관련 세미나에 다녀와서

 

  요즘 한미 FTA협상문제로 온 나라가 뜨겁다. 얼마 전에 어느 신문사주최 관련세미나에 갔던 것도 정확하게 상황판단을 해보고자 함이었다.

  정부 관리들은 발표시간 내내 뭔가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고 했고 최선을 다해서 피해를 줄여 보겠노라고 했다. 아무리 들어도‘무엇을’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것을 보니, 지금까지 아무런 준비가 없었지만 이제부터 뭘 해보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협상개시는 선언한 상태인데 지금부터라면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답한 것은 어느 누구도 FTA체결 이후 우리에게 무엇이 득이 되는지 확실히 알려주질 않았다. 또한 왜 우리가 미국이 정해놓은 시한에 전전긍긍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농촌경제연구원 권오복박사의 연구결과를 놓고 다른 국책연구기관에서 왔다는 토론자가 장미 빛 이론을 내세우며 지레 겁먹어 불안감만 조장하는 근거 없는 수치라고 반박했다. 피해규모는 8조에서 1조사이로 왔다 갔다 했다. 몇 백 만원 몇 천 만원이라면 어떻게 이해를 하겠는데 금액이 워낙 천문학적 수치라 솔직히 실감이 안 났다. 다만 이 시점에서 왜 우리가 또 손해를 봐야하는 가라는 생각에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민들은 더는 단돈 만원도 손해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지정토론이 시작되자 농민단체에서는 조목조목 정부주장에 대한 허구를 지적하며  농민단체가 연대하여 끝까지 저지투쟁에 나서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마음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는 대목이었다. 저녁 착유 때문에 불가불 집에 돌아 와야 하는 상황이라 중간에 일어설 수밖에 없어 토론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투쟁이라는 단어가 끈질기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투쟁! 투쟁! 그 뼈 시린 단어가 말이다.

  몇 년 전에 「잉여원유차등가격제」의 갑작스런 시행으로 일방적으로 정한 기준이상으로 생산한 우유에 대해서는 반값 밖에 줄 수 없다고 통보가 왔다. 문제는 그런 중대 결정과정에서 생산자가 빠진 일방적인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협상을 진행한다고 판을 벌이다가 급작스럽게 농가대표를 무시하고 전월부터 소급적용하겠다는 통보를 해온 것이다. 그렇게 무시를 당하고는 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혹독한 1월의 추위 속에 20일 동안 꼬박 시위를 한 적이 있었다.

  낙농가 시위는 아무도 신경을 안 쓴다. 저녁 착유 때문에 세시만 되면 자동해산 된다는 공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악착같이 매달렸다. 새벽에 일어나서 우유를 짜고 버스에 몸을 싣고 가면서 좀 더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문구를 연구해 내고 노래를 연습하며, 그렇게 20일을 보내는데 버스한대 시위비용이 하루에 거의 육, 칠십만 원씩 들었다. 악에 받친 삼십여 낙농가들은 그 돈을 충당하느라 주머니를 털었다. 설이 코앞에 닥친 데다 그만두지 않으면 우유를 안 가져가겠다는 마지막 카드를 내밀었다. 국면이 급박하게 돌아갔지만 결국 시위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30년을 이어온 목장을 정말 그만두고 싶었다. 이런 풍토에서 우유로 생계유지를 한다는 것이 치욕스럽기만 했다. 농가대표였던 남편의 체중은 20일 만에 4kg이 줄었고 당뇨병이 찾아왔다. 그 때 느꼈던 거대한 힘에 대한  증오감, 내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방을 망가뜨리고 싶은 충동, 왜 사람들이 명분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가도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완전히 생업에의 의지를 상실해 버린 것이었다. 그것을 추스르느라 애썼던 일, 날카로워진 농가들 사이의 긴장감,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니까 원망과 분노에 휩싸여 합리적인이고 효율적인 생각을 할 수도 없고 자발적으로 무엇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가슴앓이 속에서 우린 상식을 요구한 대가를 오랫동안 치러야 했다.

  국가가 개인의 운명을 좌우하는 경우는 역사에서 보면 비일비재한 일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쟁일 것이다.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했지만, 일어난 전쟁은 어쩔 수가 없다. 한미자유무역협상 개시는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선포와 다름없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전쟁을 벌였냐고 탓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는 데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선은 살아남아야만 한다. 전쟁에서 속절없이 죽어간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살아 남아야하는가? 이건 너무나도 절실한 물음이다.

  시위를 투쟁방식의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시위가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이 되기에는 지불해야 할 비용이 매우 크고 그에 반해 얻어지는 것은 너무 보잘 것 없다. 오로지 신뢰를 전제로 한 끈질긴 대화와 협상으로 차선(次善)이 아닌 최선(最善)의 방식을 찾아내야만 한다.

 

 

조사모삼 (朝四暮三)의 지혜

 

  이제 조사모삼으로 돌아가자. 원숭이는 속고 저공은 속였다라는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반드시 승패를 가르는 싸움을 해야 하며, 끝까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지루한 공방을 벌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공은 방법을 바꿔 원숭이를 기분 나쁘지 않게 하며 목적을 달성했다. 즉 투입(input)은 같은데 산출(output)은 늘어난 셈이다. 우리 모두 저공의 지혜를 본받아야 한다. 긍정적인 생각 안에서만 창조력도 가능하고 상상력도 풍부해진다. 단적으로 말해 21세기에는 창조력과 상상력 없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미국에서 시작된 나비의 날개 짓이 우리나라에 토네이도로 다가오는 상황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부풀려진 절망감도, 불필요한 낙관이나 방관도 절대금물이다. 사태를 정확하게 인식해야한다. 농민단체 지도자들의 고뇌는 아마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합리적인 방어선을 구축하고 실리를 챙길 수 있도록 적극 도와야 한다.

  정부와 학계, 농민이 힘을 합쳐 국민들의 개안(開眼)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다. 농업·농촌에 대한 이해를 구걸할 것이 아니라, 농업․농촌이 무너지면 농민보다 국민들이 더 손해가 될 것이라는 이 수학공식보다 더 명확한 사실에 눈뜨도록 도와주자. 농업·농촌의 공익적 가치를 일깨우며 비전제시를 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현명한 소비자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소비자들은 더 현명해져야 한다. 그들의 현명한 판단을 돕기 위해 우리 스스로 업그레이드를 해 보이자. 장수시대에 농업·농촌은 반드시 뜬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날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가자. 신명나게 일하며 인간의‘삶의 질 향상’에 자신들의 태(胎)를 묻은 땅과 그 땅에서 키워내는 먹거리가 주춧돌 역할을 해야 함을 몸으로 일깨우자.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새봄이 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 [생활과 농약] 3월호 '신년단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