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을 거닐며

  집에서 목장을 오가다 보면 어느새 주머니엔 알밤이며 도토리가 그득하다. 하늘은 가슴이 철렁하도록 푸르고 햇살은 자신조차 태워 버릴 양 온몸으로 열기를 뿜어내던 격정의 여름을 잊은 듯, 우아한 중년의 여인처럼 넉넉하고 따스하게 계절을 어루만진다. 소쩍새 울던 봄밤 아름다운 깍지를 풀고 분분히 떨어져 눕던 꽃잎의 환생이던가, 눈물방울 같은 열매를 지어 여름을 견뎠던 나무는 홀연히 떠날 준비로 분주하다.

이제 나무들은 서서히 상실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때는 가을!

분에 넘치게 넉넉한(?) 가을을 보내게 된 것은 순전히 몸속에 생긴 쓸 데 없는 조직을 떼어 내느라 고생한 몸을 보(補)한다는 명목이었다. 억세게 몸을 놀려도 될까 말까한 일거리를 밀어두고 나는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을 실컷 읽으며 ‘문학의 숲’을 거니는 호사(豪奢)를 누리게 되었다.

며칠간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지만 뜨끔거리는 수술부위의 통증과 마뜩찮은 두통은 성가시고 시간은 더디 흐르기만 했다. 마땅하게 시간을 잊을 만한 것은 아무래도 책이 제격인지라 책꽂이 앞에서 서성거리다 작년에 읽었던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꺼내들었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장영희 교수의 조선일보 문학칼럼을 모은 에세이집이다. 동서양의 명작들은 그의 펜 끝에서 또 다른 명작으로 태어나 읽는 이에게 문학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키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또한 시류를 날카롭게 꿰뚫어 보는 담론들은 문학이 문학으로만 머물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가들이 얼마나 피 흘리는 창작에의 고통에 몰입해 왔고, 독자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길 꿈꾸며 이 세상에 얼마나 숭고하고 드높은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 문학의 숲에서 거닐어야 하는지를 일러준다.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이 풀려나오 듯 그의 글에는 막힘이 없고, 어디 맑고 깨끗한 숲에라도 있는 듯 그의 문학이야기에는 청정함이 있다. 그가 예기치 않은 큰 병마와 싸우고 있을 때 우리는 다시 그를 볼 수 없을까봐, 그의 새로운 글을 읽지 못하게 될까봐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다시 읽는 책은 새롭게 나를 감동시켰다.

그것은 위대한 사람들의 위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치열하게 인간내면을 조망하는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가르쳤던 학생들에게서 찾아내고 때로는 가족과 이웃 그리고 사회현상에서 건져낸다. 추천 글에서 김점선 화백은 ‘정확하고 온화하게, 그리고 표 안 나게 강한 글을 쓴다.’고 말한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물질만이 해결 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문학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인간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인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또 다른 창조 작업이 아닐까.

책은 읽는 이의 철학과 이성, 감성과 상황, 주변여건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 어떤 이에게는 별 감흥이 없던 것도 또 다른 이에게는 인생을 뒤바꿔 버릴 감동을 줄 때도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책속에서 길을 찾고 위로를 받고 주인공이 되어 대리만족을 하는지…. 우리는 늘 우리의 이상을 배신하는 현실 속에서 생활을 위해, 때로 비굴하고 때로는 계산적인 자신의 이중성을 문학을 통해 얼마나 보상받고 싶어 하며 또한 인간다운 삶의 이상을 갈구하는지…. 자신의 내부에 사랑과 미움, 괴로움과 비탄, 고통과 환희, 만족과 감동, 희열을 넘어서는 저 높은 ‘마음의 성역’을 갖기를 원하는지…. 이 모든 것은 읽는 이의 가치에 의해서 백인백색으로 태어나서 자라고 열매 맺기 때문이다.

며칠 전 언니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우리의 우상이었던 영어 선생님을 TV에서 봤다고 했다. 문득 어느 덧 중학교교장이 되신 초로의 선생님모습에 겹친 자신의 소년기를 되돌아보며, 이제 오십 중반의 나이가 허탈하다는 소회를 이야기했다. 쌍꺼풀진 눈에 곱슬머리와 강한 눈빛 평균이상의 키에 잘 생긴 총각선생님은 사춘기 여학생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었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검색한 사진 속의 선생님은 그냥 수수하고 평범한 초년의 노인이었다. 전화 한 통이면 간단하게 연결 될 가까운 곳에 선생님은 계셨다.

고등학교 때 뒷자리에 앉았던 그 친구는 쉬는 시간만 되면 내게 화장실을 가자고 했다. 영어 수업이 없던 날도 간혹 왔다갔다 하다보면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가시는 선생님을 만나는 행운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도서관 담당이셨던 선생님은 일요일이 되면 몇몇 학생을 나오라고 해서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을 같이 했고 점심으로 자장면을 사주시곤 했다. 그 기막힌 자장면 맛, 텅 빈 도서관 창가에 스며들던 부드러운 햇살, 잔 먼지 날리는 오래 된 책에서 나던 퀴퀴한 냄새가 주던 뭔지 모를 고풍스런 안정감, 무엇보다 책 하나하나에 분류표를 붙이고 뜯어진 책을 보수하며 선생님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만족감과 기쁨은 특별한 것이었다.

선생님은 간간이 우리가 꼭 읽어야 할 책들을 지적해 주시곤 했다.

넉넉한 집안의 막내였던 그 친구는 웬일인지 졸업을 하자마자 열 살 많은 시장에서 장사하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버렸다. 철없던 그때 우리는 친구가 입었던 그 당시로는 드물었던 분홍색 약혼드레스에 대해서 많이 부러워했지만, 이듬해 딸 하나를 낳고 살던 친구의 뒷소문은 우울하기만 했다. 뺨이 붉고 피부가 고왔던 친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고 하더니 딸이 여섯 살 되던 해, 목을 매단 채 발견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과 자살에 대한 억측들만 무성한 사이로 서서히 잊혀져갔다.

선생님의 소재를 인터넷으로 확인 하던 날 그 친구가 생각났다. 무엇이 그 친구에게서 웃음을 앗아간 것일까. 어린 딸을 두고 스스로 이승의 인연을 끊어버린 극단적 선택을 해야 했던 그 고독하고 막다른 시간들. 그 친구에게 진정 한 권이라도 위안을 주는 책이 있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참으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진한 아쉬움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부질없어질 가치들에 집착하는 자신이 시시해질 때,

인드라의 그물에 얼기설기 얽힌 관계가 주는 적막감이 통증처럼 젖어들 때,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혼돈의 상황이 찾아 왔을 때,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을 가치를 찾아,

그물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바람이 되고 싶어,

마음을 비우고 현실을 넘는 비전을 갖고 싶어 나는 책을 집어 든다.

그러나 독서량은 분주하기만 한 생활 안에서는 마음에 훨씬 못 미치기 마련이다. 그런 내게 주어진 한 달간의 호사는 이미 비탈을 내려가는 내 인생에 새로운 점등의 기회를 주었다.

문학은 내게 친구요, 위로자요, 스승이요, 때론 경쟁자이기도 하다. 폐부를 훑는 언어로 독자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작가들을 보며 내 빈약한 문학적 상상력을 부끄러워하고, 아직도 세상살이에 노련하기는커녕 풋내 나고 어설프기만 한 자신을 담금질하며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희망한다.

문학의 숲을 거닐며….